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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칼럼] 한·일 관계, 정치에만 휘둘릴 수는 없다

중앙일보 2013.11.13 00:35 종합 35면 지면보기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지난주 일본에서 한 손님이 한국을 찾았다. 일본 다도(茶道)의 최대 유파인 우라센케(裏千家)의 전 대표이자 현 대종장(大宗匠)인 센겐시쓰(千玄室)였다. 만 90세. 일본 다도계의 최고 권위자다. 한국 중앙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84년 로마 교황을 알현하고 바티칸 대성당에서 헌다식을 거행해 화제를 불렀다. 98년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초대로 청와대를 방문해 차를 대접하고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올해 4월엔 미 국회의사당에서 상·하원 의원들을 상대로 다도 시범을 보였다. 일본 정부 ‘문화외교’의 간판스타인 셈이다.



 방한 중인 센겐시쓰 대종장과 점심을 함께 나눌 기회가 있었다. 김용운 전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 정구종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소장이 참석했고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도 동석했다. 나를 제외하고는, 비록 입장은 다를지라도 현재의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대화에서 양국 정치인·매스컴 사이에 거론되는 현안들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차(茶)와 양국 고대사 이야기를 했다. 고대 백제인들이 일본에 집단 이주한 사실, 일왕(아키히토)이 2001년 “옛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며 모계(母系)의 백제 유래설을 고백한 얘기, 센겐시쓰의 조상이자 현대 일본 다도의 창시자인 센노리큐(千利休·1522~91)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반대하다 죽임당했다는 설 등이 화제에 올랐다.



 센겐시쓰의 15대조 센노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었으나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주군으로부터 할복을 명 받고 배를 갈라 죽는다. 조선 침략 반대 외에 다기(茶器)를 비싸게 팔거나 딸을 도요토미에게 바치지 않아 미움을 샀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센겐시쓰 대종장은 “조선 다기를 사랑했고 평화를 원했던 분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센노리큐의 일생을 그린 역사소설이자 나오키상 수상작인 『리큐를 찾아서』에도 조선에 대한 깊은 애착과 동경이 곳곳에 묘사돼 있다.



 센겐시쓰 일행은 지난주 ‘한·중·일 화합 기원 헌다식’ ‘동아시아 차 문화 심포지엄’ ‘패널 토론-동아시아 문화와 평화’ 등의 행사에 두루 참석하고 귀국했다. 예상대로 한국 매스컴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한·일 관계가 이토록 냉랭한데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차 얘기? 아마 이런 분위기가 일조했을 것이다. 지난 7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중·일 3국 고위급(차관보급) 회의가 시종 딱딱하고 어색하게 진행됐고, 그제 도쿄에서 개최된 한·일 고위경제협의회도 애초부터 성과가 나오기 어려운 모임이었다. 오늘 한·일 국방차관이 만난다지만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으로 기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저렇게 뻗대고 있는데, 총리 측근이라는 인사가 “정상회담이 안 되는 것은 한국 국내 사정 때문”이라고 부아나 돋우고 있는데 양국 관계가 풀릴 까닭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며칠 전 벨기에에서 “정상회담을 해서 관계가 좋아져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더 악화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양국 간 강(强) 대 강(强) 기류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한·일 관계가 과연 정치·군사·외교적 측면뿐이었는지 이럴 때일수록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양국 사이에는 하드웨어만 있었던 게 아니다. 긴 시야로 보면 소프트웨어가 더 큰 역할을 했다. 센겐시쓰의 조상이 동경한 조선의 도예기술은 한반도가 전한 수많은 소프트웨어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근·현대의 한국은 한발 앞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으로부터 신학문과 각종 신기술을 들여와 재기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강제병합·식민지화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려 긴 안목과 시야를 가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일 관계에 정치·외교가 전부는 아니다. 성숙 단계에 들어선 경제·문화 교류가 있고 무엇보다 일반 국민 간 다양한 풀뿌리 교류가 있다. 정치가 막혀 있다 해서 다른 분야의 풍성하고 다층적인 교류 협력까지 지장받아선 안 된다. 솔직히 말해 요즘 양국 관계를 보면 ‘차라리 더 악화돼 아예 바닥을 쳤으면’ 하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든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과거사·영토 등 숱한 현안들 중 조만간 해결 가능한 것, 더 기다려야 할 것, 이대로 현상 유지해야 할 것들이 보다 선명히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지나치게 정치에 휘둘리는 관계는 양국 모두에 바람직하지 않다. 양국 관계는 지금 커다란 구조조정기에 들어서 있다. 이럴수록 문화 교류 같은 저변(底邊)이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정상회담? 따지고 보면 그리 급할 게 없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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