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NN 서울·홍콩 특파원 필리핀 2신
교통 단절로 생필품 전달 안 돼
상점·구호차량 약탈 '무법천지'
인구집중·부실주택이 재앙 키워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러 상점을 약탈하고 구호품을 실은 적십자사 소속 차량까지 습격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가게 주인은 “식량만이 아니라 냉장고·세탁기 같은 가전제품까지 쓸어갔다”며 “타클로반 인구 99%가 가톨릭 신자인데 믿기지 않는 일”이라고 탄식했다. 페이스북 등 인터넷에는 상점을 지키기 위해 총기로 무장한 점주들의 사진이 올라왔다.
치안 부재를 틈타 600여 명이 수감된 타클로반 교도소에서 일부 죄수가 탈옥하는 일도 벌어졌다. AP통신은 12일 지역 군 관계자를 인용해 달아나는 죄수들에게 경비대가 총격을 가했다고 전했다.

필사의 탈출 행렬도 이어졌다. 12일 타클로반 공항에 필리핀 군용기 2대가 착륙하자 3000여 명이 삽시간에 몰려 아수라장이 됐다. 빗속에서 아기 엄마들은 "이대로 있으면 다 죽게 생겼다”며 자식들만이라도 비행기에 태워 달라고 호소했다. 전날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했던 필리핀 당국은 군과 경찰력을 증강 배치했다. 마닐라 스탠더드 투데이에 따르면 11일 경찰 특별기동대 883명이 타클로반·오르모크 등지에서 치안 확보에 나섰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깨끗한 물”이라고 CNN 특파원들은 입을 모았다. 강가에 방치된 시신들이 식수를 오염시키면서 420여만 이재민을 더욱 절망케 하고 있다. CNN이 만난 ‘국경 없는 의사회’ 관계자는 “수질 오염으로 인한 전염병이 생존자들을 다시 사지로 내몰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필리핀 국가재난감소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날까지 확인된 사망자가 1744명, 부상자가 2487명이다. 사마르섬에서도 400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실종된 것으로 집계됐다. 동사마르와 세부에서도 각각 162구, 63구의 시신이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피해가 이렇게 커진 데는 필리핀 방재 시스템에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타클로반만 해도 최근 40년간 인구가 3배(22만여 명)로 늘어나면서 태풍에 취약한 해안가에 집단 거주지가 밀집하게 됐다. 가옥 3채 중 1채가 목재 외벽을 둘렀을 정도로 시공도 부실했다. 게다가 태풍 상륙 전 당국이 수차례 대피령을 내렸음에도 주민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집을 비웠다가 도둑이 들까 두려워한 것이다.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허리케인을 연구하는 브라이언 맥놀디 교수는 “이번 재앙은 75∼80%가 자연보다는 인간의 책임, 즉 인재(人災)”라고 말했다.

강혜란·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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