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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올드 스타일 유럽 순방

중앙일보 2013.11.12 00:35 종합 35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영국·벨기에 등 유럽 3개국 순방을 마치고 지난 주말 귀국했다. 취임 후 다섯 번째 해외 나들이였다. 미국과 중국을 가장 먼저 방문했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주변국까지 들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특별한 현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언제 가도 갈 곳인데 임기 초에 좀 당겨서 간 정도 아닐까.



 청와대는 ‘창조경제 세일즈 외교’니 ‘한류 문화 외교’니 하며 방문 성과를 포장하기에 바쁘지만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지상 최고의 만찬’이니 ‘황금마차’니 하며 박 대통령에 대한 극진한 환대를 강조한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의 반응은 “소우 홧(So what?)”이다. 우리가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얘기도 아니고, 우리 대통령이 외국에서 받은 환대 때문에 국격이 올라간다고 믿는 사람도 별로 없다.



 순방에 얽힌 뒷얘기를 시시콜콜 전하는 청와대나 이를 받아 보도하는 언론이나 올드 스타일인 건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의 한복 패션이 어떻고, 외국어 실력이 어떻고 요란을 떠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들으면 식상하다. 대통령은 외국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하면 효과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번 순방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다. 초선인 그가 어떻게 수행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쳇말로 그는 확실하게 ‘한 건’ 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기간 중 일부 교민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부정선거 항의 집회’를 보고 페이스북에 격한 울분을 토로했다. “이들을 과연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걸 보고 피가 끓지 않으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닐 것”이라고 적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번에 파리에서 시위한 사람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다”고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했다. 박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한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고,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등 인터넷과 SNS에서 대박을 터뜨렸으니 ‘노이즈 마케팅’의 완벽한 개가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무시한 사람이 주군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올드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나는 그가 의외로 잘할 수도 있다고 믿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독재자의 딸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볼 건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변전(變轉)이 심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사람인 만큼 인간과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다를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아버지의 두뇌와 어머니의 가슴이 결합된다면 우리가 일찍이 보지 못한 새로운 리더십을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도 품었다.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을 보듬어 안는 모성애적 포용력도 기대했다. 그가 약속한 ‘100% 대한민국’의 ‘국민행복시대’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벌써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매일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재미없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요즘 시대의 코드에 맞는 새롭고 쿨한 것을 기대했는데 구닥다리 흑백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이다. 재미와 감동은 없고, 올드 스타일의 칙칙한 장면만 계속되니 지루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논란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싼 논란도 아직 안 끝났다. 박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라지만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논란을 수습할 정치적 책임은 있다. 초기에 문제를 인정하고, 법에 따른 엄정한 처리를 약속했다면 논란의 확대재생산을 막을 수 있었다. 질질 시간을 끌다 문제를 더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청구도 마찬가지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1심 판결도 나기 전에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것도 대통령 외유 중에 말이다. 종북 프레임에 걸어 반대 진영을 옥죄는 유신 시대의 공안통치가 부활하는 느낌이다. 가랑비에 솜옷 젖듯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야금야금 훼손될까 걱정이다.



 청와대는 60% 가까운 지지율에 안심하는 모양이지만 지지율이야말로 믿을 게 못 된다. 빠지는 건 순간이다. 그래도 8개월 반 만에 기대를 접긴 이르다. 나라와 국민이 불행해진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국민에게 우리 사회가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고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줘야 한다. 청와대의 심기일전을 촉구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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