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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의 시시각각] 노인을 위한 지하철은 있나

중앙일보 2013.11.12 00:34 종합 34면 지면보기
남윤호
논설위원
말 자체에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경우가 있다. 무임승차란 말이 그렇다. 그럼 노인이 무료로 지하철을 타는 건 어떤가. 형식상 무임승차라 해도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어르신의 기분을 고려하면 다른 말이 낫지 않겠나. 무임수송, 경로우대 등 괜찮은 말도 있다. 그런데도 지하철 공기업들은 굳이 무임승차라는 말을 쓰며 축소·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처음부터 뭔가 의도가 담기지 않았나 싶다.



 이는 원래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대한노인회의 건의에 따라 결정한 것이다. 당시 대한노인회 회장은 대통령의 장인(이규동)이었다. 서슬 퍼런 지시에 아무도 ‘그게 아니고요’라곤 하지 못했다. 거창하게 사회적 논의를 거친 것도, 유교적 전통을 확립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그 결과 지하철 공기업들이 비용을 떠안는 구조가 돼 버렸다. 초창기엔 군말이 없었으나 시간이 흘러 적자가 커지면서 비용 분담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노무현정부 초기인 2003년엔 감사원이 국고 지원 방안을 강구하라고 건설교통부에 통보했으나 달라지진 않았다. 여기에다 정부가 운임을 억누른 것도 지하철의 적자 요인이다. 1974년 8월 15일 개통한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기본운임은 30원이었다. 당시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이 연간 23만원이었다. 이게 지난해 2559만원으로 110배 넘게 상승하는 동안 운임은 35배 올랐다. 경로우대 대상을 축소하거나 50% 할인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그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물리거나 줄이자는 말이 통하겠나. 게다가 지하철 공기업들이 내놓은 통계도 매우 거칠다. 돈 받으면 노인 승객이 대폭 감소할 텐데도 현행 기준으로 제시한 무임손실은 심한 뻥튀기다. 또 받지 못한 운임을 손실로 잡는 것도 회계원리에 어긋난다. 이는 매출 차질액이지 영업손실이 아니다. 어르신들이 숫자에 약하다고 운임 차질을 마치 적자의 주범으로 몰면 곤란하다.



 현실적으로도 공감을 얻지 못한다. 무엇보다 방만 경영이 문제다. 감사원 감사 결과를 보면 이러고도 경로우대를 없애자는 말이 나오나 싶을 정도다. 감사원이 10년 전부터 없애라고 한 퇴직금 누진제를 붙들고 있질 않나, 상가 임대 비리에 연루되거나 스크린도어 설치비를 과다 지급하질 않나…. 이를 두고 경로우대를 손본다면 어르신들 지갑 털어 젊은 공사 직원에게 보태자는 거나 뭐가 다른가.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발상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누가 경로우대를 없애겠나. 무상보육과 맞물려 애들에겐 척척 돈 쓰면서 노인 괄시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십상이다. 결국 지하철 공기업들은 안 될 줄 알면서 한번 들이대본 것인가. 계속 적자 나도 내 책임 아니라는 면죄부라도 받겠다는 심산인가.



 젊은이들이 주류인 인터넷 공간에선 찬반이 뜨겁다. 나름 대안도 나온다. 소득에 따라 노인 운임을 차등화하자, 한 달에 무료 승차권을 일정량 주는 식으로 바꾸자, 출퇴근 시간에 한해 유료화하자….



 서양에서도 노인의 교통이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사회적 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대세다. 경로 사상에 따른 게 아니다. 삶의 질, 교통복지 차원의 결론이다. 그럼 우리의 어르신들은 도대체 어디 가려고 지하철을 탈까. 2012년의 한 실태 조사에선 ‘친교 모임’이라는 응답이 78%에 달했다. 진료(8.2%), 가족방문(7.7%)은 의외로 적었다. 유료화하면 노인들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흔들린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지하철 경로우대는 도덕이나 재정의 잣대로만 풀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오늘 내일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차라리 5년, 10년 시간을 정해 개선안을 마련하는 게 낫다. 운임 현실화, 할인율 조정, 구조조정, 국고 지원 등 모든 안을 다 꺼내놓고 푹 익힌 뒤 골라 보자는 것이다. 그 정도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세월 금방 간다. 지금 야박하게 구는 이들도 나이 좀 들면 생각 바뀌지 않겠나.



남윤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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