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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스타 셰프들, 파인다이닝 제자백가 시대 열다

중앙선데이 2013.11.10 00:42 348호 14면 지면보기
코코넛 가루와 염소 치즈에 흑마늘, 고춧가루를 가미한 허브 샐러드 ‘불 드 네쥬’. 동그란 염소 치즈에 코코넛 파우더를 입혔으며 아래 소스는 흑마늘로 만들었다. 주변을 두른 허브는 이탈리아 파슬리로 고춧가루도 뿌렸다. 사진 피에르 가니에르
뒤마가 미식의 나라 프랑스 사람이라는 건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들린다. 세계 최고의 요리를 자랑하는 프랑스. 이곳에서 미식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게 빨간색 『미슐랭 가이드』다. 타이어회사 미슐랭이 자동차여행 안내지도를 만들면서 1933년부터 각지의 빼어난 레스토랑에 하나부터 3개의 별을 부여한 게 시초였다.

한국 파인다이닝의 진화

퓨전 한식 선전으로 파인다이닝 주목
선정 기준도 자동차여행 가이드답다. 자동차여행 중 ‘들를 만한 레스토랑’에는 1개, ‘길을 돌아가더라도 갈 가치가 있는 음식점’에는 2개를 줬다. 그럼 최고 등급인 별 3개짜리는 뭘까. 짐작대로 ‘별도의 여행을 하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레스토랑’이다.

이 책의 권위는 가히 절대적이다. 전 세계 어디든 ‘미슐랭 별 몇 개짜리냐’가 레스토랑의 수준을 말해 주는 바로미터다. 자연히 미슐랭 별 보유 레스토랑이 몇 개냐가 한 나라의 외식문화 수준을 대변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퓨전한식을 표방하는 미국 뉴욕의 레스토랑 ‘JUNGSIK’이 지난달 1일 미슐랭 별 2개를 받아 화제가 됐다. 한국의 고급 음식점, 즉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4200여 개의 뉴욕 레스토랑 중 별 2개 이상은 12곳이 전부다.

딸기젤리로 만든 ‘스트로베리 디저트’.
JUNGSIK은 세계 3대 요리학교 중 하나인 미국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유학한 임정식 셰프의 식당. 임 셰프는 군대 취사병으로 복무하면서 요리에 푹 빠졌다. CIA 졸업 후 그는 해외 경험을 쌓은 뒤 20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정식당을 서울 신사동에 연다. 한식과 프렌치를 접목시킨 그의 요리는 많은 매니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임 셰프는 만족하지 않았다. 2011년 ‘세계 요리의 천국’이라는 뉴욕 맨해튼에 JUNGSIK을 열어 다음해 별 1개, 그리고 올해 별 2개를 얻은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이름을 딴 피에르 가니에르의 ‘알베르트 카뮈 룸’.
뉴욕서 미슐랭 별 둘, 한인 셰프의 저력
임 셰프의 성공이 한국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전반적 도약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소수일망정 젊고 유능한 셰프들에 의한 이 땅의 고급 음식문화가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렇다면 용어조차 생소한 ‘파인다이닝(Fine Dining)’이란 뭔가. 말 그대로 ‘훌륭한 정찬’이란 뜻으로 프랑스식 최고급 요리를 뜻하는 ‘오트 퀴진(haute cuisine)’에 토대를 뒀다. 오트 퀴진은 호화스러운 프랑스 왕실의 요리에서 발전해서 1900년께 조르주 에스코피에라는 전설적인 요리사에 의해 지금의 형식이 확립됐다. 가장 큰 변화라면 음식을 하나씩 차례로 올리는 코스요리가 도입됐다는 거다. 그때까지 프랑스에서도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지금의 파인다이닝은 한두 가지의 애피타이저로 시작해 메인코스, 디저트, 커피에다 와인 등을 곁들인 고급 코스요리를 뜻하게 됐다. 하지만 요리만 훌륭하다고 파인다이닝이 될 순 없다. 세련된 분위기와 빈틈없는 서비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 진정한 파인다이닝이다.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파인다이닝으로 불릴 만한 곳은 최고급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라 페닌슐라, 조선 나인스 게이트, 힐튼 시즌스 등등.

하나 호텔 레스토랑 전성시대는 90년대 말부터 큰 격변기를 맞는다. ‘궁’ ‘시안’을 필두로 새로운 레스토랑들이 퓨전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청담동에 등장했던 것이다. 이들이 한국 외식문화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때부터 외식문화의 고급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던 거다. 특히 미국 코넬대 출신의 20대 이모씨가 연 시안은 트렌디한 청담동 문화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씨는 일본계 미국인 셰프인 토드 니시모토를 데려와 퓨전요리를 선보였다. 시안은 독특한 요리뿐 아니라 세련된 인테리어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아시안 퓨전을 표방했던 시안의 성공에 힘입어 이씨는 일식 퓨전 레스토랑인 ‘타니’를 열었다. 이와 함께 중식·일식은 물론 이탈리아 요리까지 한식처럼 서빙했던 ‘궁’, 중식 퓨전 ‘빠진’ 등 10여 개의 퓨전식당이 청담동 일대에 다투어 들어섰다.

이 무렵 퓨전과 함께 유행한 말이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이었다. 불어로 ‘신(新)요리’라는 뜻의 누벨 퀴진은 너무 인공적이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재료의 자연스러운 맛을 살리는 조리법을 의미했다. 레스토랑 가이드 ‘다이어리알’의 이윤화 대표는 “이제는 진부한 느낌마저 들지만 당시 많은 레스토랑이 누벨 퀴진을 표방했었다”고 설명했다.

외환 위기 극복 후 고급외식 새바람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흐름은 일류 호텔급 부티크 레스토랑이 속속 출현했다는 것이다. 1999년 단 두 테이블을 놓고 운영했던 프렌치 레스토랑 ‘라미티에’가 압구정동에서 문을 열었다. 뒤이어 문을 연 ‘팔레드고몽’ ‘따스트뱅’ 등도 수준급 요리를 자랑했다.

프렌치뿐 아니었다. ‘안나비니’ ‘본뽀스토’ 등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이 무렵 등장해 파인다이닝 애호가들을 즐겁게 했다.

적잖은 식대를 지불해야 하는 파인다이닝은 기본적으로 경제 상황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주머니가 넉넉해져야 값비싼 외식을 즐길 수 있어서다. 98년 외환위기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던 한국 경제가 2000년대 들어 회복세를 보인 덕에 파인다이닝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2000년 이후 움트기 시작한 파인다이닝의 세계는 바야흐로 개화기를 맞은 느낌이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고급 외식문화 분야에선 새바람이 불고 있다. 바로 외국의 명문 요리학교를 다녔거나 국내 일류 레스토랑에서 실력을 다진 젊은 스타 셰프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스타 셰프 시대의 문을 연 이는 두바이의 최고급 호텔 부르즈 알 아랍의 총괄 주방장이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에드워드 권이다. 2009년 귀국한 그는 언론매체의 각광을 받으며 셰프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더불어 2000년대 초부터 프랑스·미국·일본 등의 해외 일류 요리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젊은 셰프들이 한꺼번에 돌아오면서 파인다이닝의 세계는 질적 변화를 겪게 된다. 미슐랭 별 2개를 따낸 임정식 셰프를 비롯해 어윤권(구르메에오), 신동민(미코), 오세득(줄라이), 윤화영(메르씨엘·부산), 임기학(레스쁘아), 타미리(비스트로욘트빌) 등이 그들이다.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국내파도 수두룩하다. 장명식(라미띠에), 최현석(엘본 더 테이블), 유희영(유노추보) 셰프 등은 국내 일류 레스토랑에서 훈련을 받은 뒤 독창적 요리를 만들어 낸다. 전통 한식을 발전시켜 파인다이닝 수준으로 끌어올린 셰프들도 속속 등장했다. 임지호(산당), 노영희(품) 등이다.

서울 사람이 찾아가는 지방 레스토랑도
스타 셰프의 등장과 함께 주목되는 현상은 세계 최고 레스토랑들이 분점 형태로 국내에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미슐랭 별 3개에 빛나는 프렌치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가 2008년 롯데호텔에 문을 열었다. 외국에 가지 않고서도 세계 최고의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서울 어느 곳보다 훌륭한 일류 레스토랑이 지방에 등장한 것도 또 다른 포인트다. 부산 해운대에 자리 잡은 메르씨엘이 대표적인 사례다. 윤화영 오너셰프는 “KTX 개통 이후 주말이면 서울에서 온 손님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귀띔했다.

재능 있는 셰프들과 초일류 레스토랑의 출현으로 한국의 고급 외식문화는 전례 없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미슐랭 별 둘 이상에 해당되는 최고급 레스토랑이 많아졌느냐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음식 맛과 레스토랑 분위기가 좋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서비스 측면에서는 아직 요원하다는 것이다. 음식평론가 강지영씨는 “한국에 진정한 파인다이닝이 정착되려면 무엇보다 홀 직원과 매니저, 소믈리에 등의 서비스가 개선돼야 한다”며 “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세상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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