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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떠도는 감흥 … 마음의 사치?

중앙선데이 2013.11.10 01:55 348호 27면 지면보기
존 바비롤리(1899~1970년)는 이탈리아계 영국인 지휘자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49년 작위를 받았다. 사무엘 버스턴의 작품. [벡스힐 뮤지엄 소장]
가을 무한 쓸쓸함…. 이런 감정 참 상투적이지 않나 싶지만 마치 편안한 소파에 몸을 누이듯 11월 늦가을의 허허로움이 마음을 위무해 준다. 이 계절에 쓸쓸이와 함께 놀며 심란해지지 않는다면 너무 쓸쓸한 일이다. 그리고 브람스. 여전히 11월이듯 여전히 브람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감상주의는 과녁을 벗어난, 잘못 그려진 그림과 같은 감정이라는데 일부러 과녁을 벗어나고 싶은 심리에는 어떤 용어가 적합할까. 마음의 사치?

[詩人의 음악 읽기] 브람스 1번 교향곡

고독을 사치처럼 질근질근 씹으며 홀로 늦가을 브람스 축제를 벌이는 와중에 한 사람을 만났다. 베를린 신포니에타 상임 지휘자 박성준. 피차 지면으로만 알고 있던 사이였다. 통상 직업 음악가들이 오디오를 멀리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열정적인 오디오파일로 유명하다. 잡지에 소개된 그의 던텍 소버린 스피커의 위용을 여러 번 봤다. 그를 만난 날 세 군데를 전전하며 브람스 탐구를 했다. 먼저 던텍이 모셔져 있는 그의 집을 거쳐 내 작업실, 그리고 이어 세상에서 제일 비싸다는 웨스턴일렉트릭 오디오 수집가로 소문이 자자한 모 재벌 회장의 개인 음악실까지. 점심시간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강행군이다. 박성준이 주장했다. 이상하게 브람스 교향곡 지휘에 좋은 연주가 드문데 그중 존 바비롤리가 빈 필하모닉을 연주한 것이 스스로 발견한 최상의 연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 수많은 기기에 바비롤리의 브람스 1번 교향곡 LP를 돌리고 또 돌렸다.

어쩌면 기기와 공간 분위기에 따라 이토록 다른 브람스가 구현될까. 놀라웠다. 오디오 사운드는 주인 따라간다는 말이 맞다. 던텍의 브람스는 느긋했고, 웨스턴일렉트릭에서는 덤덤했고(거창한 사운드가 웨스턴의 특징이건만 회장댁은 매우 다르게 튜닝되어 있었다), 내 공간의 유러딘 스피커는 예민하다 못해 신경질적으로까지 들렸다. 참으로 각기 다른 느낌의 브람스였다. 혹시 그동안 나는 내가 구축한, 선입견에 가득한 브람스를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년의 브람스.
브람스의 1번 교향곡을 베토벤 10번이라고 부른 한스 폰 뷜로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4악장 중반부터 전개되는 바이올린 파트는 베토벤 ‘합창’ 교향곡 테마와 무척 흡사하다. 그런 지적에 대해 브람스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이렇게 당당했다. ‘빈, 집시, 이탈리아에 매료된 북방인 브람스를 미학적인 면에서 보수주의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어떤 프랑스 음악학자는 기존의 통념을 수정했다. 브람스 음악은 ‘막연한 우수, 애매한 욕망, 항상 떠있고 항상 변화를 계속하는 마음의 움직임, 규정하기 어려운 마음속 부분을 명쾌한 음악 언어, 명석한 대위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로맹 골드롱의 해석도 떠올려본다. 브람스의 여자관계도 생각해 볼 문제다. 클라라 슈만과의 순애보만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혀 다른 언급도 있다. ‘브람스는 너무나 고귀한 생각을 갖고 있는 탓에 정숙하지 못한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정신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토록 희한한 전기 작가의 사생활 변호라니! 중년 이후 곰처럼 비대해진 몸으로 담배와 커피를 더없이 사랑하고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며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쾌활하게 좌중의 흥을 돋우었다는 브람스. 반면에 자기 진짜 속내는 타인에게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좀 음흉한 성격.

각기 다른 공간에서 다양한 사운드로 브람스를 들으면서 한 인간의 여러 면모가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다른 사운드를 내는 오디오처럼 감상자 역시 각자 자기 기분의 브람스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애상적인 기분으로 고독한 독신 예술가의 쓸쓸한 선율을 탐닉하는 것이 어쩌면 과녁을 벗어난 주관적이고 어리석은 감흥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그러나 그런들 어쩌겠는가.

고교 시절 한스 노삭의 소설 ‘늦어도 11월에는’을 읽으며 브람스 교향곡을 처음 만났다. 한 남자와의 우연한 만남에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 그녀가 이런 술회를 한다.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다. 행복했다고 느껴지는 기억의 빈 공간이 있긴 했지만, 정작 그 공간을 채우려 들면 어느 하나 거기에 맞는 게 없었다’. 브람스 선율이 그러했다. 꽉 짜인 화음의 전개로 모든 개별 악기가 한 덩어리의 소리 묶음을 구축하는데 언제나 더 커다란 마음의 공백지대가 자꾸만 생겨난다. ‘정처 없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이 브람스 교향곡의 특징이어서 소리는 흘러가지만 어디로도 도달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흐르기만 한다. 늦어도 11월에는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며 안타까운 다짐을 하던 소설 속 남녀 주인공 마음이 그랬다. 끝끝내 이루지 못하는 소망처럼 늦가을의 브람스 교향곡은 공중을 떠돈다. 그 선율, 그 싸한 감흥을 딱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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