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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야스쿠니 전범들

중앙선데이 2013.11.10 02:12 348호 29면 지면보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올해 안에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다는 얘기가 솔솔 나온다. 야스쿠니는 원래 메이지 유신 이후의 보신(戊辰)전쟁, 세이난(西南)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등의 전사자 246만6532명의 명부를 보관하며 제사 지내는 신도(神道) 사원이었다. 1978년 ‘쇼와(昭和)시대 순난자’라는 적반하장 같은 이름으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하면서 군국주의의 상징이 됐다. 46~48년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에 따라 처형된 7명과 재판·수형·병 보석 중 병사한 7명이다. 전사자가 아닌 군인에다 문관까지 합사한 건 이례적이다. 사망원인 기재란에 ‘법무사’라는 전례 없는 신조어를 썼다.

전범 14명의 면면을 알아두면 군국주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형자 7명 중 히로타 고키와 무토 아키라를 제외한 5명은 육군대장 출신이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사망 당시 64세)는 총리 재임 시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총리·내무대신·육군대신·참모총장을 겸하며 군국주의를 추구했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려 무모한 전사자를 양산했다.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70)는 난징대학살을 자행한 중지나군 사령관이었다. 학살을 저지른 부하들을 ‘황군의 명예에 먹칠했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처벌은 하지 않았다. A급 전범으로 기소됐으나 무죄 선고를 받고 학살 관련 B급 전범 행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과 중국군의 희생은 아시아에서 유럽·미국 식민지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놨다.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63)는 만주사변을 주동했다.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64)는 특무기관 책임자로 중국에서 모략·이간질로 만주국 건국과 중국 화북지방의 분리 공작에 앞장섰다. 기무라 헤이다로(木村兵太郎·60)에겐 육군차관 당시 개전 책임을 물었다. 버마방면군 사령관으로 영국군에 패하자 괴뢰 버마와 자유 인도 정부의 요인과 일본대사관 직원, 부상병을 버려둔 채 자신만 빠져나왔다.

무토 아키라(武藤章·56)에겐 중국 침략과 난징대학살 책임을 물었다. 도쿄전범재판(필리핀 등 다른 지역 전범재판 제외) 사형자 중 유일한 육군중장이다. 히로타 고키(広田弘毅·70)는 총리대신·외상을 지냈는데 문관으론 유일하게 A급 전범으로 처형됐다.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온갖 침략전쟁을 기획했다.

병사자 7명은 군인 셋과 문관 넷이다. 진주만 기습을 승인한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67) 해군원수,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자신은 살아남아 항복문서에 서명한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67) 육군대장, 조선총독으로 학병제를 도입하고 전쟁 말기에 총리를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70) 육군대장 등이 군인이다. 문관으론 외상 출신으로 군국주의 외교를 이끈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66), 조선 도공의 후예로 태평양전쟁 개전·종전 때 외상을 지낸 도조 시게노리(東郷茂徳·60), 반(反)서구 강경 외교를 주도한 시라토리 도시오(白鳥敏夫·62), 총리에다 쇼와 천황의 비공식 고문을 지낸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85) 등이 있다. 이웃 나라는 물론 일본 자신까지 불행으로 이끈 군국주의의 섬뜩한 역사를 실행한 인물들이다. 전후 세대로선 이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나서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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