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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6700 ↘ 2500 ↗ 6100 ↘ 3300원 '배추값 멀미'

중앙일보 2013.11.08 00:04 경제 4면 지면보기
배추값이 공급 과잉으로 폭락 조짐을 보이자 중간 수집상들이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등 농민들이 배추 판로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지난달 31일 충남 세종시 장군면 산학리에 있는 배추밭에서 한 농민이 출하에 대비해 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전북 고창에서 밭 3만3000㎡(1만 평)에 배추농사를 지은 농민 정재욱(51)씨는 요즘 전화통을 붙들고 산다. 정씨는 지난 9월 산지 수집상과 평당 5000원(총 5000만원)에 배추를 팔기로 계약했으나 최근 수집상은 연락을 끊었다. 32년 만에 태풍 없는 해가 되면서 정씨의 배추밭에는 큰 풍년이 들었다. 평당 10포기가량이 알도 큼직하게 들어찼다. 그러나 정씨는 계약해 놓고도 판매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해마다 널뛰는 배추값



평당 원가 4000원의 절반 수준 호가



배추의 유통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정씨처럼 ‘계약재배’를 하는 경우와 속칭 ‘밭떼기’라 불리는 포전거래다. 계약재배는 산지 수집상들이 7월 하순~8월 초순에 농민들을 찾아가 거래 대금의 30~50%를 계약금으로 미리 준 뒤 선매입하는 방식이다. 상인들은 추석이나 10월 말께에 한두 차례 중도금을 추가 지급하기도 한다. 문제는 8월에 평당 5000원에 계약했는데 날씨가 좋아 출하 시기인 11월에 공급과잉이 현실화하면서 시세가 평당 3000원 미만으로 떨어졌다는 데 있다.



이마트 장희성 농산물 바이어는 “5000원에 계약한 상인들은 평당 2000원씩 손해를 보는 셈인데, 잔금을 치를수록 손해가 커지기 때문에 계약금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주식으로 치면 계약금만큼 잃더라도 손절매하고 빠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인들의 계약 파기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농민 정씨는 “주변 농가에는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전체 매입가의 50~70%를 준 상인들조차 ‘시세 흐름을 지켜보겠다’며 잔금 지급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상인들이 ‘손절매’하면 농민의 피해는 더 커진다. 배추의 경우 평당 5000원의 거래가 가운데 4000원 정도가 비용이다. 농민 순수입은 평당 1000원, 즉 20%가량 된다. 정씨의 경우 계약금으로 30%인 1500만원을 받았기 때문에 중간상인이 배추를 포기할 경우 원가의 절반도 건지기 어렵게 된다.



산지 수집상들 계약금 포기하고 잠적



 ‘밭떼기’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상인과 농민 간에 가격이 맞지 않아 매매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밭떼기는 9월 말이나 10월께, 즉 작황 윤곽이 어느 정도 나오는 시점에 거래가 이뤄진다. 통상 상인들은 일반 농가보다 출하 시기가 한 달 이상 빠른 강원도 고랭지 배추의 시세와 작황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고랭지 배추의 작황이 좋고 가격이 떨어지면 밭떼기 거래에 나서지 않는다. 한 대형마트 바이어는 “밭떼기에 나서는 상인들은 농민들보다 작황에 관해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며 “가격이 오를 움직임을 보이면 파종을 하는 시점에 거래에 나서기도 하지만, 올해처럼 폭락이 예상될 때는 최대한 매입 시기를 늦춘다”고 설명했다. 배추가 남아돌면 매입해도 판매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또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더 떨어질 수 있어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농민 입장에서도 평당 4000원씩 들여 키운 배추를 원가에도 못 미치는 2000~3000원에 거래하자는 제안에 선뜻 응하기 힘들다. 롯데마트 우영문 채소팀장은 “아파트도 가격 폭락세에는 거래가 끊겨 실거래가 대신 호가만 오가는 것처럼 배추 거래도 폭락세에서는 평당 2000~3000원이라는 호가만 있지 실제로는 그 가격에도 거래가 안 된다”고 설명했다.



 거래가 끊기면서 농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지금쯤 목돈을 쥐고 배추밭에서 손을 뗀 뒤 후작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발만 구르고 있다. 정씨는 “겨울을 날 난방비도 못 마련할 지경”이라며 “이대로라면 이달 말께는 배추밭을 갈아엎는 농가가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밭에 방치된 배추의 품질 하락도 문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품 가치가 더 떨어지기 때문에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다.



농민들 “밭 갈아엎는 곳 속출할 것”



 농민들 사이에는 수요 예측에 실패하는 정부를 원망하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 최근 5년간 배추 가격은 해마다 폭등과 폭락을 되풀이했다. 한 농민은 “농작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거나, 공급이 동시에 줄어들지 않게 정부가 나서서 공급량을 조절해 줘야 하는데, 이런 요구를 되풀이해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여름에 심어서 가을에 거둘 작물로 배추·무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정부가 재배 면적을 조절하려 해도 농민들이 일단 심고 보는 일도 많다. 농민 피해가 커질 조짐을 보이자 이마트·롯데마트 등 대형 할인매장들은 산지 직송전을 열고 농가 돕기에 나섰다. 이마트 민영선 신선식품 담당 상무는 “올해 배추 100만 포기를 계약 재배로 공급받아 판매하고 있다”며 “농가에 안정적인 판로를 제공하기 위해 계약재배 면적을 꾸준히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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