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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투자자문사의 자문자답, 살려고 '성장주 스타일' 버렸소

중앙일보 2013.10.22 00:33 경제 2면 지면보기
올 초 약사인 김영훈(46)씨는 삼성증권 주가연계증권(ELS) 랩어카운트(이하 랩)에 1억원을 투자했다. 랩은 고객이 맡긴 재산에 대해 자산 구성에서부터 운용·투자 자문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해주는 금융 서비스로, ELS랩은 주식이 아니라 ELS로 포트폴리오를 짠 랩 상품이다. 김씨는 “당시 코스피가 박스권에 갇힌 상황이었던 만큼 일정 구간 내에서 주가 흐름이 나타날 경우 수익을 보장해주는 ELS에 투자했다”고 말했다. 이어 “정해진 수익률 구간 아래로 주가가 떨어지면 손실이 나는 게 위험 요소인데 가치투자에 특화된 VIP투자자문이 ELS 종목을 고른다는 말에 믿음이 갔다”고 덧붙였다. 방어적인 전략을 택한 김씨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매월 83만원의 월 지급금을 받고 있다.


랩 붐 꺾인 지 1년 … 분화·특화 투자로 부활 날갯짓

 지난 7월 한국투자증권의 ‘아임유랩-케이클라비스’에 1억원을 투자한 주부 이영자(58)씨는 김씨와는 반대의 경우다. 그는 코스피 시장이 향후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강세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미래에셋 출신의 구재상 케이클라비스투자자문 대표를 선택했다. 두 달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씨는 실제로 10%가량의 수익을 냈다.



가치투자 전략으로 자존심 지켜





 ‘자문사=성장형 스타일’이던 공식이 깨지고 있다. 오히려 저마다의 스타일을 앞세워 특화의 길을 걷고 있다.



 변화를 이끈 건 위기였다. 2009년 삼성증권의 ‘삼성팝골든랩’을 필두로 투자자문사의 자문을 받는 랩 시장이 국내에 도입됐다. 자문형 랩 시장과 함께 자문사가 성장하며 증권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고객 자산을 맡아 운용하는 일임형 랩 시장도 커졌다. 스타 매니저들은 너나 없이 독립을 선언하며 자문사를 차렸다. 정점은 2012년이었다.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여파로 증시가 급락하자 이른바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7공주(LG화학·하이닉스·제일모직·삼성SDI·삼성전기·삼성테크윈·기아차) 등에 압축 투자해온 자문사들의 수익률도 급락했다. 2012년 10월 미래에셋 출신 서재형 대표의 창의투자자문이 대신자산운용에 인수되면서 ‘자문사 붐’도 한풀 꺾였다. 자문사들의 분화와 특화는 그 이후 가속화됐다.



 위기 속에서 자문사의 명맥을 유지하게 해준 곳들은 가치투자형 자문사였다. 서울대 출신 최준철·김민국 대표가 이끄는 VIP투자자문이 대표적이다. 최준철 대표는 “가치투자는 법원 경매사이트를 뒤져 헐값에 나온 부동산을 고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며 “시장이 오를 때는 남들보다 수익이 덜 날 수 있지만 시장 상황이 안 좋을 때 어느 정도 선에서 방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증권사보다 탄탄한 인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스몰캡(중소형주)팀을 보유한 한가람투자자문도 가치투자로 유명하다. 국민연금 1조원 이상을 운용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도 한가람의 경쟁력으로 꼽힌다.



 반면 최근엔 성장주 전략을 쓰는 정통형 자문사들이 인기다. 연일 외국인 순매수가 이어지면서 경기민감주와 대형주 중심으로 코스피가 오르고 있어서다. 한국의 펀드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구재상 대표가 이끄는 케이클라비스도 그중 한 곳이다. 브레인자산운용 부사장 출신 김태홍 대표가 설립한 그로스힐투자자문은 아예 회사명에 성장을 뜻하는 영어 단어(그로스)를 넣었다. 그로스힐은 올 상반기 중소형주가 인기를 끌 때도 고집스레 대형주 비중을 70% 수준으로 유지했다. 김 대표는 “덕분에 6월 증시가 하락할 때 타격을 받지 않았고 하반기 대형주가 장을 이끌 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알리안츠GI자산운용에서 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를 운용하며 이름을 알린 김정우 대표의 쿼드투자자문은 중소형주형으로 분류된다. 중소형주 비중을 늘 30% 정도로 유지하는 전략을 쓰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잘 고른 중소형주 하나가 웬만한 대형주보다 낫다는 게 쿼드투자자문의 투자 철학이다. 중소형주는 언뜻 가치주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치주는 대형주건 중소형주건 저평가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외국인 순매수 덕 성장주도 요즘 인기



 선물·옵션 시장에 특화된 곳들도 있다. 인터넷 닉네임 알바트로스로 더 유명한 성필규 대표가 차린 PK투자자문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자동 매매 기법(시스템 매매)을 써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공격형 자문사로 볼 수 있다. 반면 박상운 대표의 FWS투자자문은 주식 투자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 선물 투자를 활용하는 안정형 자문사다. 이곳은 특정 종목이나 지수의 방향성에 투자하는 선물의 속성을 활용해 주가가 떨어졌을 때의 손실을 선물을 통해 만회하는 전략을 쓴다.



 이외에도 기업의 인수합병이나 기업 분할 같은 이벤트를 활용하는 V&S투자자문은 이벤트형으로, 가치투자 전략을 쓰다 수탁고가 늘면서 해외 주식으로 영역을 넓힌 케이원투자자문은 해외주식형으로 분류된다.



 삼성증권의 미러링어카운트는 8개 자문사를 선정해 8개 상품으로 운용된다. 삼성증권 랩 운용팀이 발굴한 투자자문사의 투자법을 그대로 복제하는 상품으로, 총 400억원 규모로 자문사당 평균 50억원 수준으로 작게 설정됐다. 삼성증권 문진철 랩 운용팀 차장은 “동일한 수준의 수익률을 원하더라도 고객마다 투자 성향이 다른 만큼 이를 반영하기 위해 소규모로 여러 개의 상품을 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덩치 크면 위험 … 다품종 소량 생산



 과거엔 한두 개의 대표 상품을 대규모로 운영해왔다면 이젠 다양한 상품을 여러 개 만들어 작게 운용하는 게 증권업계에 자리 잡았다. 펀드도 랩도 규모가 커지면 시장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렵다. 대형 펀드나 랩이 특정 종목을 팔기 시작하면 가격이 떨어져 수익률이 낮아지는 악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국투자증권 신긍호 고객자산운용부 부서장은 “전환사채(CB) 등에 투자하는 메자닌펀드 같은 특화 상품이나 가입 인원을 49인 이하로 제한한 폐쇄형 헤지펀드가 인기를 끄는 것도 다품종 소량생산 현상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한투증권의 스텝다운형 랩처럼 고객이 직접 목표 수익률을 정하는 상품까지 나왔다.



 시장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이슈도 있다. 바로 수수료다. 자문형 랩의 경우 2.5% 안팎의 보수를 받고 일임형 랩의 경우 1.5% 수준의 보수와 함께 성과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수수료가 비싸다 보니 운용 성과가 안 좋으면 수수료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진다. 특히 지난 8월 발효된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에 기준 지표보다 수익률이 낮을 경우 보수를 줄이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업계 반발 움직임도 감지된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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