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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일본의 재무장, 미국도 고민한다

중앙일보 2013.10.16 00:37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하경
논설실장
미 의회조사국(CRS)의 8월 2일자 미·일 관계 보고서를 읽었다. “논쟁적인 과거사 쟁점에 대한 아베 총리의 언행이 지역관계를 틀어지게 하고 미국의 국익을 해칠 것(hurt U.S. interests)이라는 우려를 일으켜왔다”라는 대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서였을까. 미국이 지난 3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과의 2+2(국무·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공식적으로 지지했지만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일본이 그토록 원했던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는 공동합의문에서 빠졌다. 미국은 자위대의 선제공격에 반대한 것이다. 미국의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1급 전범이 합사된, 한·중의 ‘혐오시설’인 야스쿠니 신사가 아닌 무명용사의 묘를 찾아가 헌화했다. 미묘한 움직임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일본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은 재정적자로 국방비를 대폭 줄여야 하는 답답한 현실 때문이다. 오죽하면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핵심라인이었던 마이클 그린이 지난해 12월 집단적 자위권을 지지하면서 “일본의 1인당 국방예산은 세계 최저 수준이며, 바베이도스나 트리니다드 토바고, 버뮤다와 비슷하다”고 불평했을까.



 일본의 과거사 부정은 미국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처리 과정에서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히로히토 일왕의 죄를 묻지 않았다. 일본은 역설적으로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정상적인 국가의 길로 나아갈 기회를 박탈당했다.



 유럽에선 20세기의 뒤안길로 사라진 동서냉전이 21세기의 동북아에서는 중국을 견제하는 미·일 동맹의 강화를 통해 신냉전으로 부활하고 있다. 한 세기 전인 1902년 세계 최강국인 영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일 동맹을 맺은 상황이 데자뷰된다. 영국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 돈까지 대줬다. 의기양양한 승전국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을 집어삼켰고,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일 동맹을 해체해 제국주의와 팽창주의를 다자간 협조체제로 전환시킨 1921~1922년 워싱턴 회의를 주도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세계를 주무르는 9개국이 참가했다.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기도 한 워런 하딩은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군축협상의 주역이 됐다. 미국은 영국에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졌고, 일본이 중국에서 침략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동맹관계를 깨라고 요구했다. 바로 그 미국이 지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상황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핵을 가진 북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실은 중국이 타깃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그렇다면 중국을 미국에 적대세력이었던 냉전시기의 소련으로 취급하는 게 온당한가. 미국이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중국은 군사·안보적으로는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다투겠지만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상호의존적이다. 미국의 국채를 가장 많이 사들여 재정적자를 메워주고 있는 나라다. 파산 위기의 미국 주지사와 시장들은 베이징의 실세를 찾아가 투자를 요청하고 있다. 그런 중국을 ‘공동의 적’으로 놓고 미·일 동맹을 강화해 일본을 재무장시키는 신냉전 구도를 미국이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경쟁과 협력이라는 이중적 관계라면 대결을 전제로 한 양자동맹 중심의 구도보다는 미국과 한·중·일이 모두 참여하고 러시아·북한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까지 참여하는 다자협력구도가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 공존을 위한 탈냉전의 현실적·합리적 접근인 이유다. 특히 미국의 확고한 안전보장 아래 일본의 일류 기술을 이전받고,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에 물건을 팔아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려면 남북관계 개선이 필수적이다. ‘핵무기 개발을 하는 북한’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냉전구도의 결정적인 명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적 자위권에 미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의기투합하기 시작한 것도 북핵 위기가 대두된 1993년부터였다. 남북 간 신뢰가 구축되고 긴장이 완화되면 미국·일본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가 줄어들고 우리의 입지가 강화된다. 일본 재무장의 명분도 확 줄어든다.



 체제가 다른 남북관계의 특성상 내가 한 개를 주면 저쪽도 한 개를 줘야 한다는 기계적 상호주의로는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긴 역사적 호흡을 유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미국도 내심 한국과 중국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유럽이 다자협력구도 아래서 탈냉전의 평화공존을 이뤄냈듯 아시아에도 기회는 있다. 우리가 당당한 자세로 명분과 조건을 만들어 내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하경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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