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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5000달러면 살아 … 미국 자발적 빈곤층 급증

중앙일보 2013.10.16 00:33 종합 21면 지면보기
미국 오리건주 동부의 한 마을. 댄 프라이스(56)는 목초지 위에 나무토막들로 지은 작은 굴에서 잠을 깬다. 그가 75달러(약 8만원)를 들여 지은 원 모양의 굴은 지름이 2.4m, 천장까지 높이는 1.2m밖에 되지 않는다. 프라이스는 이곳을 ‘호빗 굴’이라 부른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키가 작은 종족의 거주지에 빗댄 것이다. 토지 임대료는 한 달에 100달러다. 다른 이들 눈에는 누추한 거처이지만 프라이스는 “이곳이 천국”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삶' 위해 집·일 버려
굴에서 자고 시리얼로 끼니

 식사는 시리얼로 한다. 냉장고가 없어 우유를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시리얼에 물을 부어 먹는다. 생계 유지는 비정기적으로 생기는 허드렛일을 하거나 황무지의 삶을 다룬 작은 책자를 만들어 팔아서 한다. 이 책에 언급해 주는 조건으로 스폰서들에게 옷이나 음식을 받기도 한다. 프라이스가 한 해 쓰는 생활비는 5000달러에 불과하다.



 전도 유망한 사진기자였던 프라이스는 23년 전 이혼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이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높은 대출 이자, 자동차 할부금 등 끝없이 날아오는 고지서에 질려 ‘단순한 삶’을 선택했다”며 “집 대출을 갚느라 뼈빠지게 일만 하고 결과적으로 그 집에서는 오래 지내지도 못하는 것만큼 정신 나간 일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자발적으로 빈곤을 선택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프라이스처럼 끝없는 소비의 악순환에 질린 이들도 있고, 경기 부진을 계기로 황금 만능주의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미 NBC 방송은 13일(현지시간) ‘의도적 빈곤층(intentional poor)’의 삶을 조명했다.



 이름을 반조라고 밝힌 23세 청년은 뉴욕 외곽 길거리에 산다. 상위 1% 부자의 탐욕을 규탄하는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에 왔다가 아직까지 머물고 있다. 반조는 “우리는 주택 모기지 회사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등쳐먹는지 똑똑히 봤다. 우리는 경제 체제를 비웃으며 원하는 아무 곳이나 여행할 수 있고 곳곳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NBC는 반조와 같은 ‘거리의 아이들’은 노숙자와 차이가 있으며 페이스 페인팅을 하는 등 펑크 스타일을 보인다 해서 거터 펑크(gutter punk)로도 불린다고 설명했다.



 NBC는 이들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기존의 부유한 삶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경우와는 구분된다고 전했다. 특히 미 빈곤층의 절반 이상이 히스패닉과 흑인인 반면 자발적 빈곤층은 대부분 백인이다. NBC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이는 고정적 노동과 소비만이 삶의 정석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이라며 “이들은 물질을 넘어서는 진짜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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