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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광철 혼신의 열연 타이르듯, 꾸짖듯 마음을 흔들어 놓다

중앙선데이 2013.10.05 12:44 343호 24면 지면보기
바그너가 태어나고 200년이나 지난 2013년 10월의 첫날, 그의 마지막 음악극 ‘파르지팔’이 드디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랐다. 벼르고 벼른 국내 초연이었다. 예술의전당이 개관 20주년을 맞이했던 2008년 바이로이트에서 들여와서 공연할 예정이었지만 오페라극장의 화재로 말미암아 취소되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국립오페라단이 마침내 초연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바그너의 ‘파르지팔’

만드는 입장에서나 보고 듣는 처지에서 까다롭고 버겁기로는 바그너가 으뜸이다. 특히 마지막 역작 ‘파르지팔’이야말로 그 가운데 첫째로 꼽히는데 바그너가 그의 작품들만을 위한 전용극장인 바이로이트 축전극장을 완성한 다음 그 극장에서만 가능한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유일한 작품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바그너가 의도한 오케스트라 음향부터가 쉽지 않다. 그 스스로 ‘신비의 심연’이라고 불렀던 축전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무대 아래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뿐더러 덮개로 가려져 있어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고 음향 또한 깊고 그윽하여 신비롭고 장중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한마디로 우리 예술의전당의 오케스트라 피트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소리라는 것이다.

‘비슷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하고 숨죽이며 듣는데 서곡을 시작하는 오케스트라 소리가 기대 이상이었다. 로타 차그레섹이 이끈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음정과 밸런스가 처음부터 잘 잡혀서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런 점에서는 국립합창단과 CBS 소년소녀합창단이 함께한 합창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작품 전체에 견고한 뼈대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었다. 템포는 빨랐고 음량은 크지 않았지만 이것 또한 음정과 밸런스를 지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나 싶었고, 그로 말미암아 자칫 느슨해질 수도 있는 흐름에서 객석의 집중력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줄곧 인간 세상의 구원에 집착했던 바그너는 마지막에 이르러 ‘연민으로 깨달음을 얻은 순진무구한 자’가 세상을 구하여 평화를 가져오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성창과 그 피가 담긴 성배를 지키는 성배기사단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성배기사단의 왕 암포르타스는 사악한 마왕 클링조르의 사주를 받은 여인 쿤드리의 유혹에 빠져 성창을 빼앗기고 그 창에 찔린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날마다 고통 속에 살며 죄를 뉘우치지만 ‘연민으로 깨달음을 얻은 순진무구한 자’가 나타나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만이 희망일 뿐이다. ‘연민으로 깨달음을 얻은 순진무구한 자’가 바로 주인공 파르지팔로, 쿤드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클링조르가 가져간 성창을 다시 빼앗아 암포르타스와 그의 기사들, 그리고 세상을 구원한다.

이렇듯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로 말미암아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를 때면 연출이 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연출과 무대, 조명까지 홀로 맡았던 필립 아흘로는 지금의 추세가 대체로 그런 것처럼 가장 단순하면서도 허전하지 않은 상징적인 무대와 연출을 선보였고, 그런 무대를 잘 살린 붉고 푸른 원색의 조명을 적절하게 활용해 무대 뒤에 세운 대형 거울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렌카 라데츠키의 의상이 보다 단순했더라면 무대와 좀 더 잘 어울려 산만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쿤드리를 노래한 메조소프라노 이본 네프는 고음에서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파르지팔을 맡은 테너 크리스토프 벤트리와 함께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배역을 보란 듯이 잘 소화해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날의 주인공은 기사장 구르네만츠를 열연한 베이스 연광철이었다. 남녀 주인공들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여 판에 박은 듯한 노래와 몸짓을 선보였다면 연광철은 자신의 역할에 혼과 생명을 불어넣으며 때로는 타이르는 듯, 때로는 꾸짖는 듯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머지 역할들을 맡았던 우리의 젊은 성악가들 모두가 세계 어느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실력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무엇보다 뿌듯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못내 안타까웠다. 뛰어난 인재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정작 우리에게는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무대가 없다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이렇듯 늠름한 기사들을 구원할 우리의 파르지팔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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