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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미국 간 운동권 … "워싱턴을 움직이는 건 표의 논리, 그걸 깨닫는 데 30년"

중앙일보 2013.10.05 00:48 종합 16면 지면보기
일본군 위안부 규탄과 동해 병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김동석 상임이사. 그는 “위싱턴을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원리를 깨우치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했다. [중앙포토]


미국 의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표결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2010년 9월 하순. 뉴저지주 한인 풀뿌리 운동 단체 ‘한인유권자센터(현 시민참여센터·KAVC)’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워싱턴 정가의 고위 인사였다. 유권자센터의 김동석(55) 상임이사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대뜸 비아냥거렸다. “한인 유권자들은 배알도 없는 거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타결한 한·미 FTA에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반기를 들었다. 한데 앞장을 선 게 유권자센터의 텃밭을 지역구로 둔 연방 하원의원 스티브 로스맨이란 힐난이었다. 김 이사가 1993년 설립한 유권자센터는 한인 유권자의 정치력 신장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온 대표적 시민단체였다.

[사람 속으로] 뉴저지 위안부 기림비 주도한 김동석
학생운동 하다 'YH 연루' 경찰 수배
강제징집 제대 뒤 1985년 도피 유학



 김 이사는 약이 바짝 올랐다. 곧바로 워싱턴의 로스맨 의원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그는 김 이사를 보자 “주미 한국대사에게 다 얘기했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김 이사는 쏘아붙였다. “당신이 한국 외교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관심 없다. 나는 미국 시민이자 유권자로서 여기 왔다.” 내리 깔렸던 로스맨의 눈이 번쩍 뜨였다. 김 이사는 “한·미 FTA는 당신 지역구 한인 유권자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라며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유권자센터엔 수만 명에 달하는 한인 유권자 등록 명부가 있다는 걸 로스맨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있었다. 수만 장의 유권자 등록 명부는 ‘저승사자’보다 무서웠다. 로스맨은 며칠 뒤 팰리세이즈파크 시청으로 달려왔다. 한국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라며 해명에 진땀을 뺐다. 1년 뒤인 2011년 10월 11일 연방하원 FTA 비준동의안 표결에서 그는 찬성표를 던졌다. 뉴저지주 출신 7명의 민주당 의원 가운데 유일한 찬성이었다. 그는 이후 일본군 위안부 규탄은 물론 동해 병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로스맨뿐만이 아니다. 로버트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 엘리엇 엥겔 하원 외교위 민주당 간사, 애니 팔레오마베가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민주당 간사, 피터 로스캠 하원 공화당 원내 수석부총무, 일리에나 로스네트넌 전 하원 외교위원장, 스콧 가렛·빌 파스크럴 뉴저지주 하원의원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여야 거물 정치인이 그와 이름을 부르는 사이다.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은 형·아우로 지낸다. 한인 유권자 명부란 ‘요술방망이’가 만든 조화다. 미국 정계에 다리 놓을 길을 모색한 한국 정치인치고 그에게 손 벌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강원도 화천군 출신 ‘58년 개띠’



김동석 이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 신인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왔다. 2006년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과 함께한 김 이사. [중앙포토]
 그는 요즘 일본 우익의 ‘공적 1호’다. 2007년 미 연방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규탄 결의안을 통과시킨 장본인이 그다. 2010년 뉴저지주 펠리세이즈파크시에 한국 밖에선 처음으로 위안부 기림비를 세운 ‘주동자’이기도 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김 이사는 5일 세계 한인의 날에 재외동포 저명인사 순회 강연 연사로 한국에 초청됐다. 10일엔 모교인 춘천고에서, 11일엔 연세대와 인천외국어고에서 강연한다. 한국 방문에 앞서 그를 뉴욕에서 만났다.



 이번 그의 강연 제목은 ‘강원도 산골 소년이 워싱턴 정가를 흔드는 인물이 되기까지’다. 제목처럼 그는 1958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부친은 동네 유일한 신문 구독자였다. 그는 매일 아버지의 신문을 배달하면서 세상과 만났다. 산에 나무를 심고 오면 밀가루를 나눠주던 ‘록펠러재단’이란 곳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를 막연히 동경했다. 77년 성균관대에 진학했다. 강원도 깡촌에서 교과서와 신문을 통해 만난 세상과 대학 입학 후 서울에서 그가 직접 마주한 현실의 간극은 순수한 20세 영혼이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무작정 상경해 ‘공돌이’가 된 고향 친구들. 그는 “어느 날 청량리 집창촌으로 흘러 들어간 여자 동기를 만나고 며칠 동안 죄책감에 몸부림쳤다”고 털어놨다.



 죽마고우들에 대한 부채의식은 자연스럽게 그를 학생운동으로 이끌었다. 그 무렵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날아들었다. 6남3녀나 되는 빠듯한 가정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를 갔던 셋째 형의 순직이었다. 소위 임관 1년 만인 78년 한·미 합동 팀스피릿 훈련에서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형 앞으로 나온 보상금으로 고향에 교회를 지었다. 사회에 막 눈 뜨기 시작한 그로선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럴수록 반항심에 학생운동 속으로 더 깊게 빠져들었다. 급기야 79년 부산·마산 항쟁의 도화선이 된 ‘YH사건’에 연루되면서 그는 경찰의 수배를 받는 처지가 됐다.



2008년 1월 오바마 대통령이 노스캐롤라이나 민주당 경선에 승리한 뒤 미셸 오바마 여사와 찍은 사진 [중앙포토]
 결국 79년 강제징집 당해 군에 입대했다. 82년 복학하자 그는 상전벽해가 된 세상과 만났다. 군생활 3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으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적응하기 벅찼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85년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조치로 유화국면이 조성되자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닥치는 대로 원서를 쓴 뒤 가장 먼저 입학허가서가 나온 사우스캐롤라이나대(USC)로 도망치듯 날아왔다. 그러나 서슬 퍼렇던 전두환 독재 시절 미국으로 도피해왔다는 죄책감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광주의 비극을 알리는 일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근태씨와 만났다.



 그러나 이념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그에게 90년 브루클린 한·흑 충돌사건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흑인 밀집지역인 브루클린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흑인사회와 교류가 없었던 한인 동포들에게 흑인의 반감이 컸다. 크고 작은 폭행 사건이 잦았다. 사회적 약자끼리 서로 돕자는 생각에 양쪽을 화해시키려 동분서주했다. 그 와중에 92년 로스앤젤레스(LA) 흑인 폭동 사건이 벌어졌다. TV를 통해 한인 동포들이 습격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국에서조차 좌냐 우냐 낡은 이념에 갇혀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제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눈앞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93년 그는 동료 4~5명과 한인유권자센터를 세웠다. 그러곤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한인이 미국 사회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자면 유권자로서 권리부터 깨달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김 이사는 “당시만 해도 한인 유권자의 투표율은 5%에도 못 미쳤다”고 회고했다. 영어가 서툴다 보니 유권자 등록부터가 장벽이었다. 그는 한인 식당을 돌며 유권자 등록 서류 작성을 도왔다. 이듬해 난생처음 투표용지를 받아 든 사람들은 신바람이 났다. 자연스럽게 미국 선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투표율이 40% 선까지 높아지면서 한인 유권자들에게선 몰표가 나왔다. 그렇게 10년이 흐르자 기적이 일어났다. 미국 정치인들이 한인 언론에 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한인 유권자의 몰표가 박빙의 승부처에선 결정적 변수가 됐기 때문이다.



 2006년 유권자센터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 정권은 참패했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후폭풍이었다. 당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공화당과 짝짜꿍이었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기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의회엔 반일 감정이 팽배했다. 마침 일리노이주 레인 에번스 하원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서너 차례 하원에 제기해놓은 터였다. 일본군 위안부는 독도나 동해 병기 문제와 달랐다. 보편적 여성 인권 이슈였다.



위안부 규탄 결의안 통과에도 앞장



지난해 10월 김 이사가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 위안부 기림비 말뚝테러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중앙포토]
 김 이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킨 적이 있는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단번에 의기투합했다. 이후 2년 동안 거리에서 8만 명의 서명을 받아 하원의원들에게 전달했다. 수많은 한인 동포 2세 학생들은 한여름 땡볕과 살을 에는 눈보라도 마다 않고 워싱턴 의원사무실을 돌며 의원들을 설득했다. 결집된 표와 끈질긴 설득이 합쳐진 파상공세는 괴력을 발휘했다. 168명의 하원의원이 2007년 일본군 위안부 규탄 결의안에 공동 발의자로 나섰다. 여세를 몰아 그는 2010년 뉴저지주에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도 세웠다.



 2011년 한·미 FTA 비준안이 미국 의회에 상정되자 그는 이를 통과시키는 데 발 벗고 나섰다. 당시 한국의 민주당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타결한 FTA 비준에 반대해 장외투쟁까지 불사했다. FTA 통과를 위해 미국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다닌 그에게 지인들의 비난이 쏟아진 건 당연했다. “공부 좀 하라”는 비아냥은 물론 “배신자”란 저주까지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한·미 FTA는 미국 한인 사회에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좌냐 우냐, 내 편이냐 네 편이냐 편 가르기보다 중요한 생존의 문제였다.



 보수진영으로부턴 ‘빨갱이’란 음해에, 진보진영에선 ‘변절자’란 손가락질에 치일 때마다 그는 평생의 스승 김근태의 유언을 떠올렸다. 김 전 민주당 고문은 2012년 9월 병세가 짙어갈 무렵 그를 찾은 김 이사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워싱턴에서 한인 정치력을 키울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동석아 그거 꼭 해내야 한다!” 지난해 그는 전미소수민족연대협의회(NECO)가 86년 제정한 ‘엘리스 아일랜드 명예훈장’을 받았다. 이민자 혹은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미국 사회 발전에 공헌한 인물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다.



 요즘 그는 한인 동포 2세·3세는 물론 미국 청소년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한인일수록 한국에 대한 자부심과 한인이란 정체성이 약한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이나 중국인·인도인은 출세할수록 고향을 찾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 봉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해부터 시민참여센터는 뉴욕 유대인 사회의 구심점인 퀸스커뮤니티칼리지 내 홀로코스트센터와 ‘동아시아 역사 인턴십’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센터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유대인 사회가 세계 곳곳에 세운 기념관이다.



 동아시아 인턴십은 한 학기 10명의 대학생을 뽑아 동아시아의 아픈 현대사를 가르친다. 한국과 화상전화를 연결해 생존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하게 하는 건 이 프로그램의 백미다. 입소문이 나면서 신청자가 줄을 섰다. 시민참여센터는 학생들이 모은 위안부 할머니 인터뷰와 역사자료를 모아 공립학교 교재를 만들 계획이다. 중국인 사회는 난징 대학살 교재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 미국 전역의 공립학교에 교재로 보낸 바 있다. 벌써부터 뉴욕 일대 공립학교의 관심은 뜨겁다.



그는 “미국 정치는 설득과 표의 논리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처럼 단체로 몰려가 농성하고 시위한다고 풀리지 않는다는 거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미국 신문에 광고 몇 번 내는 걸로는 바꿀 수 없는 게 미국 정치다. 한인 유권자가 표로 보여주고 객관적인 자료와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을 앞세워 의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야 비로소 움직인다는 얘기다. 그는 “워싱턴을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은 메커니즘을 깨우치는 데 30년이 걸렸다”며 웃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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