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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추어탕과 신발끈

중앙일보 2013.10.05 00:37 종합 30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가을엔 추어탕을 빼놓을 수 없다. 오죽하면 추어(鰍魚)라는 그 이름에 가을[秋]이 담겼으리. 그도 그럴 것이 미꾸라지는 가을에 가장 살찌고 맛도 좋다. 그래서 예부터 추어탕은 가을철 보양식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다. “미꾸라지 곧 이추는 못에 있다. 길이 3~4치[寸]로 진흙 속에 파묻혀 산다. 가늘고 길며, 몸의 등쪽은 청흑색이다. 비늘이 없고 미끄러워 잡기가 어렵다. 등골을 벗겨내고 국을 끓여 먹으면 맛이 있다. 본성(本性)이 상당히 강건하여 움직임이 대단히 활발하다. 특히 진흙에서 강해 이추라고 한다. 추(酋)란 본래 강하다는 뜻이 있다. 맛은 달짝지근(味甘)하고 남녀 모두에게 좋으며, 비위(脾胃)를 따뜻하게 하여 기(氣)에 유익하다. 숙취를 깨게 하고, 당뇨병 등으로 입이 말라 물을 많이 마셔서 소변을 자주 보는 소갈(消渴)도 해소한다. 또한 치질에도 좋다.” 이러니 가을철 보양에 추어탕만 한 것도 드물다.



 # 며칠 전 지인이 추어탕을 끓였으니 한 그릇 같이하자고 연락이 왔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먼 길을 마다 않고 가서 그 가을밤에 기꺼이 추어탕 한 그릇을 함께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추어탕 만드는 법을 운율을 담아 시처럼 적어서 이렇게 전해줬다. “미꾸라지를 끓여서/ 뼈를 발라 육수 내리고/ 된장 조금 들깨가루 조금/ 간은 집간장으로/ 된장 많이 넣으면 된장국 되고/ 들깨가루 많으면 들깨탕 되니/ 적당히 넣어야/ 미꾸라지는 좋은 것 많이/ 시래기도 좋은 것 많이/ 마음과 정으로/ 솥은 큰 것으로/ 그래야 마음 편해져/ 자신감도 생기지.” 참으로 소박한 요리법이지만 큰 솥에 넉넉함을 담아 정성으로 만든 추어탕을 내놓고 함께하자며 부른 그 마음이야말로 정녕 이 가을 하늘만큼이나 맑고 푸르지 않은가.



 # 하늘이 열렸다는 개천절인 그제 늦둥이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가을운동회가 열렸다. 딸아이는 계주에 출전해 운동장 한 바퀴를 뛴다는 사실 자체로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일찌감치 학교로 향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머리가 하얀 아버지는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워 기운을 북돋워줬다. 아이가 현관문을 나선 후 닫힌 문을 뒤로한 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발끈을 단디 묶듯 흐트러진 마음을 단단히 매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하고. 딸아이가 계주를 뛸 때 즈음해 운동회 장소로 갔다. 40여 년 전 나 자신이 같은 학교의 운동장에서 계주를 뛰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수십 년 세월이 바람처럼 흘렀다.



 # 딸아이가 속한 백군은 근 10여m나 뒤처져 있었다. 한참 뒤처져 바통을 이어받은 딸아이는 머뭇거리지 않고 내달렸다. 그러곤 놀랍게도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 사이에 역전을 시켜 오히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이어줄 때는 5m가량 앞섰다. 운동장은 역전의 스릴을 맛보느라 탄성과 환호가 엇갈리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멀리서 아이를 바라본 아버지는 바보처럼 흐뭇한 마음에 주위도 아랑곳 않고 크게 웃었지만 정작 바통터치를 끝낸 딸아이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저 가쁜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물론 속으로는 환호했으리라. 누군가를 이겨서가 아니라 비록 작은 것이지만 아이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던 것을 해냈으므로! 그런데 딸아이는 다시 몸을 수그려 신발끈을 조였다. 아침에 출전하러 나갈 때 신발끈을 조여 매듯 다시 매는 것이었다. 그때 물끄러미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인생은 크고 작은 경주의 연속이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 하지만 이기고 나서든 지고 나서든 반드시 다시 신발끈을 매거라. 삶은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것이니깐!” 자, 이제 추어탕 끓이듯 마음솥 크게 하고 역전계주에 나서듯 신발끈 단디 묶자. 이 가을날에!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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