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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포커스] 숲의 결실 거둬들이며, 나의 한 해도 갈무리하는 계절

중앙일보 2013.09.27 00:10 8면
600년 이상의 연륜을 자랑하는 볼가강 변의 고풍스러운 도시 프료스의 가을 풍경. [사진=로리/레기언메디아]


유명 화가 이삭 레비탄이 1895년 도시의 가을을 화폭에 옮겼다. ‘황금빛 가을’이란 이 그림은 황금빛 노란색이 주를 이루는 러시아 가을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 이후 도시도 유명해졌다. 사람들이 프료스를 찾아 정취를 현장에서 음미하고 이 도시에 다차를 짓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림의 분위기를 현장에서 다시 맛보는 여행도 생겼다. [그림=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가을은 하늘이다.

켜켜이 쌓인 나뭇잎 밟으며 삶 돌이켜보고 반성도 하고 …
매서운 겨울도 준비해야지
러시아인 30% 가을 앓이

발 아래서 하늘이 운다.”



러시아 인기 록그룹 ‘DDT’가 부른 노래 ‘가을’ 첫 소절이다.



요즘 계속 가을 폭우가 쏟아진다. 출근길, 얼음같이 차가운 비가 가는 가시처럼 얼굴을 때린다. 비안개가 옷깃을 파고들며 소매로 스며들어 청바지 주머니 깊이 찔러 넣은 손으로 타고 내린다. 조금 굵은 빗방울들은 가죽 레인코트를 때리며 젖은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얕은 웅덩이에 고이면서 얌전히 찌푸린 하늘을 쳐다본다. 가을은 음울하지만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계절이다. 한국의 가을이 울긋불긋한 단풍, 민족명절 추석과 함께 온화하고 따스하다면, 러시아의 가을은 비와 상념과 고독의 시간이다.



그렇게 비에 젖은 하루가 지나간다. 하늘은 회색으로 낮게 걸렸다. 지하철 안의 뚱한 얼굴들, 흠뻑 젖은 발, 버스에 놓고 내린 우산들. 시간은 막 지나간 여름의 흔적을 지우고 겨울을 준비하며 그렇게 사그라진다.



러시아 사람들은 보통 가을에는 미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연말까지 기다려보고 그때 가서 생각해보죠.” 버스정류장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가을 폭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린다. 개인 심리의사 니콜라이는 "러시아인의 30%가 가을 우울증을 앓는다”고 말했다. 원인은 단순하다. 햇빛이 줄어들고 호르몬에 변화가 오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의 가을 취미 ‘버섯 따기’로 모은 버섯들. 스베르들롭스키 구에서 찍었다. [리아 노보스티]
그러나 흐린 날만 있지는 않다. 가을은 버섯 따기의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보다 가을이 숲에서 버섯이나 산딸기를 따는 데 훨씬 좋다. 버섯 따기는 러시아 사람들이 지나칠 수 없는 가을의 전통 행사다. 알렉세이(운전기사·54)는 “나는 아내와 함께 매년 아슈키노(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35㎞)에 버섯을 따러 갔다옵니다. 거기에 우리만의 자리가 있지요. 이것이 우리 전통이랍니다.”



기자도 지난 15일 가족과 교외의 이스트라를 다녀왔다. 교외 열차는 한가했다. 다차 시즌이 절정이던 여름만큼 사람이 많지 않아 창가의 딱딱하지만 따스한 나무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들판엔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모스크바 변두리의 단조로운 고층 아파트가 눈에 들어오더니 곧 사라지고 음울한 교외 풍경이 시작됐다. 절반쯤 벌거벗은 나무들이 가을 햇살 속에서 축축한 옆구리를 드러내며 반짝이고 남은 노란 잎사귀들은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 몸을 돌린다. 누구나 나름의 가을은 있지 않은가. 문득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글이 맴돈다.



“울적한 시절이다! 눈들이 매혹되는 시간이다!/떠나는 그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린다….” (푸시킨의 ‘가을’ 중에서)



드디어 열차가 역에 멈춰 섰다. 가을걷이를 한 밀밭을 따라 걷다 곧이어 숲 가장자리로 간다. 숲 속 나뭇잎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을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비가 그치고 기온이 급상승한 바로 지금이 숲의 수확물을 거둬들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거기까지 동행한 알렉세이가 “비가 그치면 바로 숲에 가서 버섯을 따야 합니다. 버섯은 비가 내린 직후에 많죠”라고 거든다. 러시아어에는 ‘우후버섯’이란 속담이 있다. 한국에선 ‘우후죽순’처럼 뭔가가 시간을 다투듯 빨리 생긴다는 뜻이다.



소련 시절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버섯과 산딸기를 따러’ 숲으로 갔고 버섯은 겨울과 봄의 식량으로 저장했다. 지금은 상점의 절인 버섯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늘어난다. 가을은 변치 않아도 사람은 조금씩 변하는 모양이다.



숲은 참 좋다. 고요함! 빗방울이 나뭇잎과 가지들 어디에선가 후두두 떨어진다. 숲 바닥은 켜켜이 쌓인 나뭇잎으로 온통 뒤덮였다. 우거진 숲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폭신한 양탄자 위를 걷는 듯했다. 북쪽면 나뭇잎들은 암녹색 이끼로 덮여 있다. 이끼는 멀리에서 보면 따스하고 포근해 보이지만, 손으로 만지니 차갑고 미끈거렸다. 가을 숲은 사람들에게 도시의 모든 근심을 잊게 하고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반성하고 실수를 인정하게 해준다.



버섯을 얼마나 많이 따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 열차에서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앉아 내면으로 침잠한다. 어떤 사람들의 손엔 버섯 바구니가 흔들거린다.



며칠 후 비에 젖은 울적한 날이 따뜻한 날로 바뀐다. 바비요 레토(늦더위)다. 많은 이는 바비요 레토에 가을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예브게니(34·대학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비가 그치고 쌀쌀한 날씨가 지나면 다시 여름이 습격해 옵니다. 인간은 따뜻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쌀쌀하지는 않은 햇빛이 비치는 날이 며칠이 될지를 여름 때처럼 그렇게 간단히 알지 못합니다. 가을의 차가움 뒤에 오는 이런 날은 훨씬 더 소중하고 중요해집니다.”



낮게 드리운 가을 태양은 밝고 높게 뜬 봄철 태양보다도 더 따뜻하다. 며칠간 그런 따뜻하고 근심 없는 여름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9월 말께 찾아오는 한기는 훨씬 더 매섭다. 인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직장으로 돌아가게 하고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뒤이어 겨울이 찾아온다.



엘레나 김 기자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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