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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눈 벗고 처음 쓴 시 '아들' 온라인서 화제 … "못배운 한 풀어"

중앙일보 2013.09.17 08:53 9면



충남평생교육원서 한글 익힌 임순자 할머니

올해 7월 말. ‘아들’라는 제목의 시와 사진 한 장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과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진심 어린 마음을 한 자 한 자 힘주어 써 내려간 시는 읽는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시화의 주인공은 충남평생교육원(원장 박연기)의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초등학력인정 졸업장을 받은 임순자(72·사진) 할머니. 칠십이 넘은 나이에 ‘까막눈’을 벗어나 처음으로 쓴 시였다.



 “부모를 잘못 만나 못 배우고, 못 살았습니다. 평생을 답답하게 살다가 이제야 한을 풀었어요. 한글을 몰라 은행에 가면 주민등록증을 꺼내 이름을 베껴 썼는데, 예쁘게 쓰진 못해도 이젠 떳떳하게 내 이름을 쓸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황해도 평산이 고향인 임 할머니는 한국 전쟁 때 피난 내려오다 가족과 헤어져 고아원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힘겨운 삶은 결혼 생활로 이어져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됐고 3남매를 낳고 키우면서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도리깨질을 한 보리에 섞여 있던 작은 돌멩이까지 함께 갈아 시래기와 된장을 넣어 끓인 보리죽을 먹고, 가마니때기를 걸어 방문을 삼았던 집에 시집을 갔어요. 큰아들이 뱃속에 있었을 때인데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너무 끔찍하고 고달파서 죽으려고 약국에 찾아가 약사에게 수면제를 병째로 달라고 했지요. 만삭의 임산부에게 수면제 대신 다른 약을 준 걸 모르고 식구들 저녁을 먹인 후 몰래 100여 개의 약을 삼켰어요.”



 약병에 쓰인 글씨를 읽지 못해 오히려 목숨을 건졌다는 임 할머니는 큰아들에게 유난히 미안하고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 자신이 못 배운 게 한이 돼 세 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내고 출가시켰지만 못 배우고 무지한 엄마를 둔 세 남매가 불쌍했다. 특히 힘들게 사는 큰아들을 보면 늘 마음이 쓰였다.



 임 할머니는 3년 전 천안 시내에서 목천으로 이사를 간 후 충남평생교육원의 문자해독교육 과정을 공부하며 한글을 익히게 됐다. 난생 처음 하는 공부인데 늦으면 선생이 기다릴까 싶어 교육원에 갈 때는 차를 타고, 수업을 마치면 그날 배운 글씨를 잊지 않으려고 외우면서 천천히 걸어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한글을 배운지 3년 만에 졸업장을 받게 됐지만 고관절을 다쳐 도중에 6개월 이상 공부를 쉬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요즘에는 노안으로 눈이 침침해져 글씨 읽는 일이 점점 버겁고 힘들어 속상하기도 하다. 칠십이 넘어서 겨우 시작한 공부가 몸이 안 따라와 줘 힘들어지는 일이 서러워 신세한탄을 하게 된다. 하지만 드문드문 읽고 써도 “어머니 잘 하신다”며 칭찬해 주는 아들의 말에 힘을 얻고 있다.



 “마트에 가면 글씨를 모르니 다른 사람들을 졸졸 따라 다니며 ‘좋은 물건이냐, 맛있는 거냐’ 물어보며 물건을 샀어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서 어떤 음식이 좋고 나쁜지 제대로 모르고 자식들을 먹여 키웠죠. 그런 제 자신이 너무 한스러웠는데 이제 글을 읽고 물건을 살 수 있으니 좋습니다.”



 지난달 22일 충남평생교육원에서는 임 할머니처럼 뒤늦게 한글을 깨친 11명의 어르신들이 초등학력인정졸업식을 가졌다. 평생교육원의 문자해독교육 프로그램은 충남도로부터 인증을 받아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일정시간 이수하면 졸업장을 주는 제도로 3단계를 이수하면 초등학력인정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다.



 문자해독프로그램 과정의 강사 이윤정(40)씨는 “졸업생들 모두 사연이 많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다가 뒤늦게 배움에 도전한 어르신들”이라며 “임순자 할머니는 소녀처럼 여리고 정이 많다. 눈이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한글 공부에 열의가 대단하셨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임 할머니는 “선생님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한글을 익히게 됐다”며 “6년을 공부해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데 3년 만에 졸업장을 받는 일이 당치 않지만 계속 공부하러 다녀도 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꾸준히 더 익혀서 중학교 과정도 공부하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글·사진=홍정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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