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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창낭창 대나무 터널 거닐까 치파오 입은 여인에게 기대어볼까

중앙선데이 2013.09.14 00:43 340호 8면 지면보기
2013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관. 김백선 작가는 소쿠리와 부채 등을 모아 집적의 미를 보여주었다. 부채로 만든 설치물은 마치 거북선 같다.
다섯 번째를 맞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9월 6일~11월 3일)의 올해 주제는 ‘거시기 머시기’다. 알 듯 모를 듯 왠지 구수하면서 정겨운 우리말. 영어로는 ‘Anything, Something’이라 표기했는데, 아무래도 말맛이 떨어진다. 이영혜(60·디자인하우스 대표) 총감독은 “연음되기 이전의 단어가 ‘것이기’ ‘멋이기’라고 생각해보면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한다. 일상적인 ‘것’에서 창의적인 ‘멋’을 발견해보자는 취지는 디자인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우리 시대의 석학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 말에 담긴 함의를 보다 폭넓게 분석한다. “한쪽은 암시하고 다른 쪽은 짐작한다. 그래서 ‘거시기와 머시기’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기억에 접속하는 ID이고 비밀번호다. 혼란과 질서가 겹쳐진,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 ‘거시기와 머시기’를 통해 새로운 창조의 힘을 가져와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광주광역시가 공동 주최하는 이 행사는 ‘산업화의 결과물로서의 디자인’을 보여준다. “디자인은 소비하는 것”이며 “결국 사람들이 샀나 안 샀나, 쓰나 안 쓰나의 문제”(이영혜 총감독)라는 것이다. 24개국 328명의 디자이너가 ‘거시기하면서 머시기한’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해 선보였다. 세상을 편하게, 즐겁게, 멋지게 만들기 위한 것들이다. 59일간 펼쳐지는 대장정의 현장을 다녀왔다.

2013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관람기

동양화를 모티브로 꾸민 공간디자인들.
최도영 작가의 대나무 2인 의자 ‘흐름’.
비엔날레 전시관을 찾는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는 것은 광장 전체에 조성된 ‘예쁜 텃밭’이다. ‘가든 디자인-밭을 디자인하다’를 기획한 최시영(AXISCAPE 대표)씨는 “3만 달러 시대가 되면 직접 좋은 먹거리를 가꾸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며 “밭도 예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식사 때마다 배추나 상추 등 먹거리를 즉석에서 뽑아 먹을 수 있는 ‘키친 가든’, 아이들이 소꿉놀이와 흙장난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키즈 가든’, 이웃과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하베스트 가든’ 등의 코너는 ‘도시 농부’라는 로망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정원설계사 오경아(오가든스 대표)씨가 만든 ‘디자이너스 스튜디오’는 가든 디자이너의 작업실이다. 각종 농기구와 농사용 곡물 등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도시 농부들이 꿈꾸는, 쾌적하고 아기자기한 바로 그런 공간이다. 그 건너편에 설치된 ‘농부의 빵’ 코너에서는 제과기능장 이영환씨가 천연 발효 빵을 선보이고 있었다.

한민족의 문화 DNA 구현한 주제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제1전시관은 주제관이다. 이어령 전 장관의 저서 『우리문화박물지』에 실린 ‘한국인의 문화 DNA’ 중 일부를 추려 공간디자이너 김백선씨가 형상화했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를 설명한 대목을 보자. “형태와 구조를 노출시킨 아름다움, 깨지지 않게 내용물을 보호하는 합리적인 기능성, 포장 내용을 남에게 알려주는 정보성의 세 가지 특징을 동시적으로 만족시켜 주고 있는 포장 문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형이다.” 그뿐인가. “엿장수의 가위는 자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라며 ‘가위에서 자르는 기능을 가위질했다’는 설명이나 “별을 만든 것은 하늘이지만 별자리를 만든 것은 사람”이라는 문구는 디자인의 개념을 단박에 깨치게 할 정도의 명언이었다.

이런 개념을 살리기 위해 대바구니·골무·부채·키·엿장수 가위 등 조상들이 쓰던 일상 용품 수십 수백 개를 가지런히 진열한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장쾌했다. 특히 전통 부채를 모아놓은 모습에서는 거북선의 위용마저 느껴졌다.

‘빛[光]의 도시’ 광주의 컨셉트를 알록달록 LED로 담아낸 공간이 있는 경사로를 올라가면 제2갤러리가 나온다. 자전거와 밥솥의 변천사를 그래픽과 실물을 통해 보여주는 첫 코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일상의 사물이 기실 얼마나 많은 기술적 연구와 디자인적 변화를 거쳐 우리 곁에 남아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어지는 ‘디자이너 40인의 단편’에서는 박상현·박재문씨의 ‘오픈 테이블’이 눈길을 끌었다. 탁자 표면 아래에 상판을 하나 더 집어넣어 틈새 공간을 확보했다. 식사 때라면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을 이 공간에 집어넣어 쉽고 빨리 정리할 수 있게 했다.

‘햇빛 영화관’은 사회혁신 전문 투자컨설팅 MYSC와 삼성전자 사회봉사단 C-lab의 글로벌 프로젝트인 햇빛 Lab의 결과물이다. 전기가 없는 아프리카에서 태양열 충전으로 영화 상영을 가능하게 했다. 중고 스마트폰 부품과 렌즈, 태양광 패널 등이 장착된 이 기구로 반나절 정도 태양 에너지를 충전하면 밤에 플래시 메모리 카드에 저장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디자인이 희망이 된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관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
접이식 어린이집
이번 전시에서 이영혜 총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곳 중 하나가 ‘콩다콩 어린이집’이다. “어릴 적부터 좋은 디자인과 색채에 대한 경험을 해야 한다. 낮잠 잘 때 덮는 이불 하나도 제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공들여 키워야 한다.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만큼 어린이집 관계자분들이 많이 오셔서 활용해 주셨으면 좋겠다.”

여러 교구 중 양털 쿠션이 달린 의자나 아코디언 느낌이 나는 접이식 놀이집은 활용 가능성이 커 보였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세심한 디테일
제3갤러리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냈던 곳이 중국관이었다. 디자이너의 감각이 살아있는 다양한 의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장 독특한 작품은 류샤오캉(劉小康) 작가의 ‘심상에 앉자’. 서예용 붓 수십 자루를 거꾸로 묶어 만든 의자다. 양판(Yang Fan) 작가의 ‘치파오 의자’는 전통의상 치파오를 입은 1930~40년대 중국 중산층 여인을 강렬한 붉은 색상과 우아한 인체 곡선미로 표현한 작품. ‘책장의자’도 돋보였다. 허무(何牧)와 장첸(張倩) 작가가 만든 이 의자는 좌대 주변을 책장으로 감싸 책 진열 기능을 의자와 결합했다. 의자에 앉아 편하게 책을 꺼내 읽고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 편리하다.

‘일상 속의 디자인이 된 유니언 잭’.
영국 디자인박물관의 기획전을 고스란히 옮겨온 ‘디자인드 투 윈(Designed to Win)’은 각종 스포츠 용품과 도구를 디자인 측면에서 볼 수 있게 한 전시다. 디자인과 테크놀로지의 만남 혹은 디자인이 스포츠 세계에 미치는 영향 분석이랄까. 첨단 재질 수영복 비교를 비롯해 각종 유니폼, 경기에 따라 쓰임새가 각각 다른 헬멧·장갑·신발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모아놓았다. 하지만 장갑의 경우 어떤 경기적 특성 때문에 이렇게 만들었는지 간단하게라도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매달아 놓는 디스플레이보다는 모형 손에 끼워 놓았으면 더욱 생동감이 있었을 듯.

아웃도어 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데 국내 브랜드 코오롱이 첨단 기술을 결집한 첨단 4세대 라이프테크 재킷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했다. 등판에 태양열 집광판이 달려 있어 조난 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이 총감독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관람 동선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다. 슬슬 다리가 아파질 때쯤 나타나는 게 제4갤러리다. 루이뷔통 특집 코너를 지나면 널찍한 ‘동양화 모티브 공간디자인’ 코너가 나온다. 한옥의 구성을 베드룸, 리빙룸, 다이닝룸 등의 컨셉트로 나눠 커다란 ‘ㄷ’ 자로 구성했다. 한가운데 마련된 이규석 디자이너(공간 심재 대표)의 ‘진풍유기’는 물이 찰랑거리는 테이블 위로 거대한 보름달이 영상으로 비치는 근사한 공간을 구현했다.

대나무 활용 제품에 대한 관심도 감지됐다. 대나무는 일반 나무보다 빨리 자라고 독특한 재질적 특성 덕분에 친환경 트렌드에 적합한 소재라고 이 총감독이 설명했다. 일본관을 대표하는 구마 겐고가 ‘낭창낭창’이라는 제목으로 대나무 터널을 구현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나무의 물성을 십분 활용한 작품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파도 같은 느낌을 굴곡으로 형상화한 조병주 작가의 벤치 의자 ‘굽이굽이’나, 두 명이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할 수 있는 최도영 작가의 ‘흐름’이 돋보였다.

제4갤러리에서는 재활용품으로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을 부각했다. 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 만든 미국 벤저민 롤린스 콜드웰 작가의 의자는 앉아보니 아주 편했다. 특히 홍익대 양영완 조형대학장의 코너는 업사이클링 제품의 신천지였다. 소형 카메라용 삼각대에 가루를 걸러내는 체(목재)를 올려놓고 흰색 천을 씌운 플로어 램프, 부드럽게 곡선으로 휘어지는 카본 낚싯대를 기본 틀로 삼은 거실용 조명, 다양한 색상의 페트병 병목을 잘라 만든 컵 등은 양 교수의 섬세한 손길과 세련된 감각을 잘 보여주었다.

조선대 유니버설 패키지 디자인센터의 쓰레기봉투 디자인.
마지막 제5갤러리는 공공디자인을 중심으로 꾸몄다. 장광효·우영미·고태용·최지형 디자이너와 간호섭 홍익대 교수가 각각 아이디어를 낸 택시기사 유니폼 제안 코너도 눈길을 끌었지만 조선대 유니버설패키지디자인센터(센터장 김남훈)의 쓰레기봉투와 쌀 봉투 제안은 돋보였다. 드라이하게 글자만 적힌 비닐 대신 잔디화단·꽃·배트맨과 로빈·코끼리와 펭귄 등을 형상화한 5개 구청 쓰레기봉투 디자인과 ‘함평군 나비쌀’ ‘담양군 대숲맑은 쌀’ 등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 생산되는 9대 명품 쌀의 포장디자인은 구태의연한 일상에 청량한 충격을 주며 전국적 실용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그게 디자인의 힘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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