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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끝날 때

중앙선데이 2013.09.14 02:32 340호 32면 지면보기
마누엘 푸익(Manuel Puig·1932~90) 193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첫 소설 『리타 헤이워스의 배반』(1958)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프랑스 ‘르몽드’ 최고의 소설로 선정됐다. 두 번째 소설 『색칠한 입술』(1969)은 고국에서는 판금됐으나 외국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건』(1973)은 페론을 패러디한 것으로, 푸익은 에바 페론의 암살 리스트에 올랐다. 대표작으로 『거미여인의 키스』(1976) 외에 『천사의 음부』(1979), 『이 책을 읽는 자에게 영원한 저주를』(1980), 『보답받은 사랑의 피』(1982), 『열대의 밤이 질 때』(1988) 등이 있다.
“그런데 작별 선물로 너한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데….” “그게 뭔데?” “네가 한 번도 해주지 않은 거야. 우리가 이것보다 더한 것은 했지만….” “뭐지?” “키스.” “그렇군.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내일 해줘. 나가기 전에 말이야. 너무 놀라지 마. 지금 해달라는 건 아니니까.” “좋아.” (…) “발렌틴….” “무슨 일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바보 같은 소린데… 네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아니,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 “…” “몰리나, 도대체 뭔데 그래? 오늘 나한테 부탁한 걸 말하고 싶어서 그래?” “그게 뭔데?” “키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다른 거야.” “지금 키스해 줄까?” “그래, 네가 싫지 않다면.” “날 화나게 하지 마.” “…” “…” “고마워.” “고마워해야 될 사람은 나야.”

강신주의 감정수업 <43> 감사

어떤 이유에서 이별을 하는 걸까? 이별을 앞둔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가 애잔하기만 하다. 발렌틴과 몰리나! 그렇다. 이 두 사람은 마누엘 푸익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의 주인공들이다. 방금 읽은 대목은 아르헨티나의 반체제 소설가가 1976년에 쓴 『거미여인의 키스(El beso de la mujer araña)』에서 가장 서러운 부분이다. 그보다 더 찐한 육체관계도 가졌건만, 이상하게 두 사람은 키스도 한 번 제대로 못해본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이별의 고통이 두 사람의 때늦은 첫 키스로 완화될 수 있을지. 그보다 우리 눈에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몰리나의 주저하는 마음이 포착된다. 몰리나는 무엇을 고백하려는 걸까? 그건 바로 사랑이다. 내일 발렌틴을 떠나며 몰리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발렌틴, 지금까지 사랑했었어.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거야.”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저도 그래요”라는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으면, 적어도 불쾌한 반응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면, 그 누구도 사랑을 고백하지 못할 것이다. 헤어지는 마당에 몰리나가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지금까지 함께 있어 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만 두 사람 사이에 오갈 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몰리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발렌틴은 결코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니 어떻게 몰리나가 그런 발렌틴 앞에서 사랑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자기도 속절없이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감사(gratia)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에티카』중)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은 감사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로 알고는 있지만 고백할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마무리될 때, 어느 커플이든 애잔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나랑 함께 있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선생님과 제자, 유부남과 유부녀, 신부님과 여신도, 스님과 여신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모두 이렇게 감사의 감정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서로에게 친절하려고 할 때, 같은 말이지만 서로에게 감사할 때,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에 대해 일정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의 감정은 서러운 감정이다. 이별을 앞두고 몰리나와 발렌틴이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것, 그것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감 때문에 생긴 것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를 껴안으려고 한다. 한마디로 상대방을 소유하고, 동시에 상대방에게 소유되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감정이 제대로 관철된다면, 친절의 행위는 군더더기에 불과한 것이다. 때론 무례할 수도, 때론 거칠 수도, 때론 화를 낼 수도 있다. 물론 친절할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양식들은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겠다는, 오직 그럴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는 사랑이란 폭발적인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왜 몰리나와 발렌틴은 이별을 앞두고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감사의 말만 던지고 있는가? 둘 사이의 거리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두 사람은 모두 남자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발렌틴은 마르타라는 여성을 사랑하는 이성애자였고, 몰리나는 지금 발렌틴을 사랑하게 된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발렌틴은 정부 전복 혐의로 감옥에 갇힌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몰리나는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온 게이였다.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와 감성에 민감한 동성애자의 만남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발렌틴은 몰리나에게 민감한 감성을 배웠고, 몰리나는 발렌틴에게서 모든 인간에게 억압은 없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이상을 배웠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에게 감성과 이성의 섞임은 육체관계를 맺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발렌틴은 부정했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완전해진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발렌틴은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을, 그리고 몰리나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끝내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사랑하고 있던 두 사람이 이별을 준비하면서 감사의 말만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키스를 소원했던 몰리나, 거미여인이라고 불리던 몰리나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면서.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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