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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변씨 댁 가보

중앙일보 2013.09.14 00:30 종합 30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전남 장성 축령산 기슭에 사는 변씨 댁에는 5대째 내려오는 화로가 있다. 하지만 변씨 댁에서 진짜 가보(家寶)로 여기는 것은 골동적 가치가 있을 법한 화로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재(ash)다. 흔히 가장 하찮고 허무한 것을 지칭할 때 재 같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어찌 이걸 가보라 하는 것일까? 심지어 변씨 댁에서는 새 며느리를 맞으면 이 재를 대물림한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 재는 가장 쓸모없고 가치 없는 분진처럼 여겨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이 여기서는 5대를 이어온 역사요 자긍이다. 대단한 집안 내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매서운 칼바람 이는 추운 겨울에도 화로를 둘러싸고 앉은 가족의 정겨움과 끈끈함으로 그 혹한을 이기고 이제껏 살아왔다는 자부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재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 화로 속의 남은 재 모두가 5대째 내려오는 묵은 재는 아니겠지만 설령 그 재 중에서 단 한 줌일지라도 정녕 5대를 내려오며 쌓이고 묵힌 것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바로 거기엔 혼이 담겼으리라. 그 어떤 어려움도, 그 어떤 혹한도, 그 어떤 주변의 냉대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가족의 단란함과 끈끈함이라는!



 # 변씨 댁에는 먹감나무 상(床)이 있다. 거기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그런데 이 먹감나무라는 것이 참 묘하다. 감나무는 자기 속이 검게 썩어가면서도 열매를 맺는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나중에 나무가 죽어 잘라보면 그 속이 검다. 물론 감나무의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이 검게 얼룩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변씨는 이것을 ‘부모의 마음’과 같다고 여긴다. 자식열매 맺고 그것들을 키우느라 속이 까맣게 뭉그러져가면서도 겉으론 전혀 내색하지 않다가 죽어서 베어 보아야 속이 까맣게 탄 것을 알게 되는 먹감나무처럼 부모의 애끓고 속 타는 마음 역시 자식들은 부모가 죽어서야 겨우 알게 된다. 그런 뜻에서 먹감나무의 그 검디 검은 얼룩을 ‘부모의 마음’이라 이름 한 것이리라. 변씨 댁에 있는 먹감나무는 전남 함평 월야에서 300여 년을 살다 지난 2005년 쓰러져 베어낸 나무란다. 그 나무를 갈라보니 정말이지 자연의 화가가 따로 없었다. 검은 먹감 무늬가 나무의 심중을 물 흐르듯 관통하고 있었다. 그 어떤 기성의 화가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운 추상화가 거기 그렇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정녕 먹감나무는 300여 년의 세월 동안 쉬지 않고 그렸던 것이리라. 그야말로 천지인(天地人)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낸 자연의 추상화인 셈이다. 그 세월 동안에도 먹감나무는 해마다 감을 영글게 했으리라. 속이 검어지는 아픔도 감춘 채!



 # 변씨 댁의 마지막 가보는 다름 아닌 장독대다. 세상의 음식은 ‘장독대 있는 음식’과 ‘장독대 없는 음식’으로 갈린다고 변씨는 힘주어 말한다. 자고로 음식은 시간을 담그는 일이다.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것도 시간을 담그는 것이요, 된장국 하나를 끓여내는 것도 결국 시간을 우려낸 깊은 맛의 된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한 번 맛깔난 음식은 도처에 많다. 하지만 며칠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음식은 흔치 않다. 한 번 맛깔난 음식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을, 아니 평생을 먹어도 물리지 않고 더욱 더 그리운 그 맛이 진짜 맛이다. 그 맛은 다름 아닌 시간을 담근 장독대에서 나온다. 자고로 담가서 묵혀야 진짜 생명이 살아나고 참맛이 나는 법! 그래서 변씨 댁 허름한 장독대는 그 자체로 가보다.



 # 천안 사는 이씨에겐 쌀 푸는 데 쓰는 짜개진 표주박이 가보다. 짜개진 것을 굵은 실로 꿰매가며 40여 년째 쓰고 있는 이 표주박 덕분에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다고 믿기 때문에 가보인 것이다. 그렇다. 물건 자체가 값 있어서 가보가 아니다. 그것에 어떤 마음을 담고 어떤 생각을 갖고 대하느냐가 진짜 가보를 만드는 것이리라. 지금 나의 가보는 어디에 있나? 명절이 다가오는 때인 만큼 스스로 마음의 눈을 밝혀 살펴볼 일이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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