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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변론, 간토 학살 폭로 … 일제가 두려워한 '일본의 양심'

중앙일보 2013.09.14 00:04 종합 18면 지면보기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법복을 입은 모습. [사진 국가보훈처, 현암사]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의 양심’ 후세 다쓰지 변호사. 사망 60주기를 맞아 ‘조선인의 벗’이었던 후세의 삶을 되돌아봤다.


조선인의 친구, 후세 다쓰지 변호사 60주기
톨스토이 영향 받은 휴머니스트
일본인 유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받아
식민지 토지 수탈 항의 농민도 지원
세 차례 투옥, 변호사 박탈 고초 겪어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조선 유학생 400여 명이 몰려든 가운데 최팔용(1891∼1922·독립운동가)이 단상에 올라 조선청년독립단의 발족을 선언했다. 이어 청년단 대표 11인 중 한 명인 백관수(1889∼?·독립운동가·6·25 때 납북)가 비장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전조선청년독립단은 아(我) 2000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할 것을 선언하노라.” 김도연(1894~1967·독립운동가·초대 재무장관)이 4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하고 서춘(1894∼1944 )이 연단에 올라가려 할 때였다.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 해산을 요구하고 주동자들을 연행했다.



 일제는 최팔용·백관수·서춘 등 9명을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 했다. 2·8 독립선언 1주일 뒤 1심 판결에선 최팔용·서춘에게 금고 1년이 선고됐다. 조선 청년들은 형량의 경중을 떠나 변호사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국헌 문란은 인정하지만 정상참작을 바란다(하나이 다쿠조 변호사)”거나 “조선은 일본이란 몸체에 행랑을 붙인 것과 같다. 행랑이 없어져도 일본의 국체는 파괴되지 않는다(우자와 소메이 변호사)”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선 청년들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란 변호사를 찾아갔다. 1911년 무렵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로 일제 검찰의 조사를 받았던 후세 변호사는 비굴하게 재판관의 선처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검사에게 “일본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원조한다며 시베리아에 출병까지 했으면서 어째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원조하지 않는가”라고 따졌다. 그러면서 “조선 청년들의 독립선언은 정당하다”는 변론을 폈다. 변호사 수임료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후세의 활약으로 1심에서 금고 1년이었던 형량은 항소심과 상고심을 거치며 9개월로 줄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시대 조선인들은 후세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갖게 됐다.



조선인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기념촬영을 한 후세(앞줄 오른쪽에서 둘째)와 아내 미쓰코. [사진 국가보훈처, 현암사]


 후세의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大石進)는 2007년 일본에서 열린 ‘후세 다쓰지 전시회’에서 “중요한 것은 조선 민족의 존엄에 동감하는 변호의 논리와 피고인들이 납득할 때까지 싸우겠다는 자세였다”며 “후세는 매년 열리는 2·8 독립선언 기념식에 결코 부끄럽지 않을 변호 활동을 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쓰지』참조). 그는 “학생들이 쓴 독립선언이 빛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민족의 존엄을 주장하며 마지막까지 싸웠다는 사실을 역사에 남길 필요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형제 폐지 주장한 인권변호사



 13일은 후세가 세상을 떠난 지 60주기가 되는 날이다. 후세는 53년 9월 13일 내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조선인의 친구’로서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2·8 독립선언 사건 변론 등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국무회의 의결로 건국훈장 애족장(추서)을 받았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지금까지 건국훈장을 받은 40여 명의 외국인 독립유공자 중 일본인은 후세가 유일하다. 후세를 나치 독일 치하에서 수많은 유대인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에 비유해 ‘일본판 쉰들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세 관련 기록과 자료를 발굴해 건국훈장 추서가 이뤄지도록 앞장선 ‘후세 선생을 연구하는 모임’의 정준영 대표는 “과거 정부의 서대문형무소 철거 계획에 반대해 자료를 찾던 중 뜻밖에 후세 변호사의 활약이 담긴 기록을 발견했다”며 “ 후세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펼치는 한편, 보훈처 관계자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1880년 일본 북동부 미야기(宮城)현의 농촌에서 태어난 후세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휴머니스트였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기자 출신인 장남 후세 간지(布施柑治)는 후세 변호사의 전기 『나는 양심을 믿는다』에서 “후세는 톨스토이의 제자를 자처했다”며 “서재 벽에 건 톨스토이 사진 앞에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약하고 옳은 자를 위해 저를 굳세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전했다.



박열 사건 재판에서 후세가 작성한 변론 원고(사진 왼쪽), 일왕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22년2개월 동안 수감됐던 박열과 옥중에서 사망한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사진 오른쪽). [사진 국가보훈처, 현암사]


 1902년 도쿄의 메이지 법률학교(메이지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판·검사 등용 시험에 합격한 후세는 사법관(검사) 시보로 임용됐다. 하지만 생활고로 자녀들과 동반 자살을 기도하다가 포기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검찰청을 떠났다. 이후 노동쟁의 관련 사건 변호와 사형제·공창제 폐지 운동 등에 나서면서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후세는 1920년 ‘자기혁명의 고백’이란 글을 발표하고 “앞으로는 주요 활동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고 사회운동에 더욱 솔선수범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싸우는 사건’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사건’ 등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후세는 23년 9월 간토(關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조선인 편에 섰다. 그는 대지진 직후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용기 있게 조선인 학살을 비판하고 인권 변호사들의 모임인 자유법조단을 통해 일제에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장남 간지는 후세의 전기에서 “그는 일본인의 피해망상을 막지 못한 것과 자기 사무소에 도움을 청하러 오다가 붙잡힌 조선인도 있을 것 같아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후세는 대지진 이듬해인 24년 9월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후세는 “조선인이 살해당한 상황은 말과 글로 차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며 “쇠갈고리·죽창·철사·권총·일본도 등을 사용한 방법에 몸서리가 쳐진다”고 밝혔다. 희생자의 규모에 대해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재난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2만 명 이상이었는데 그 후 생존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인은 1만2000~1만3000명”이라며 “7000명 정도의 행방불명자에서 지진의 직접 피해자 등을 제외해도 정부가 발표한 숫자(300명)는 한 자릿수가 적다”고 폭로했다. 후세는 스스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을 써서 조선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그는 사죄문에서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동포에게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식민지 근대화론’ 정면 비판



 후세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 여러 차례 방문했다. 첫 방문은 간토 대지진 직전인 23년 7~8월이었다. 조선인 유학생 단체인 북성회의 초청으로 서울과 남부 지역을 돌며 10여 차례 순회 강연을 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주장하는 개발은 조선인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했다. 후세는 26년 3월 다시 조선을 찾았다. 전남 나주군 궁삼면(현재의 영산동과 왕곡·세지·봉황·다시면 일원)에서 동양척식회사의 토지 수탈에 항의하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규수 가천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일본에서 거물급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던 후세의 조선 농촌 방문 소식은 총독부를 긴장시켰다”며 “토지 소유권 분쟁이 나주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총독부는 서둘러 동양척식회사와 농민들이 타협하도록 하면서 후세가 현지 조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폈다”고 소개했다.



 후세는 일본에 돌아가 『조선의 산업과 농민운동』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후세는 “조선 농민들이 피와 땀으로 일궈낸 땅에서 수확한 쌀과 보리 등이 모두 본토(일본)로 유출되는 것을 목격할 때 슬픔과 아픔만 늘어날 것”이라 고 밝혔다.



 보훈처는 의열단원인 김지섭(1884~1928,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박열(1902~1974,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변론을 맡은 것도 후세의 공적으로 인정했다. 김지섭은 24년 1월 일본 왕궁으로 들어가는 니주바시(二重橋)라는 다리에 폭탄을 던져 일본 전체를 놀라게 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8년 44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26년 박열은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일왕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일제의 재판을 받았다. 이전부터 박열과 친분이 있었던 후세는 박열의 법정 투쟁을 지극정성으로 도왔다. 후세는 22년2개월의 옥고를 견뎌낸 박열에게 감명을 받고 46년 『운명의 승리자 박열』이란 책을 펴냈다.



 일제는 ‘눈엣가시’였던 후세를 세 차례에 걸쳐 치안유지법·신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거·투옥하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했다. 일제 패망 후 다시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세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재일 한국인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는 53년 사망하면서 좌우명인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글을 묘비에 새겨넣었다.



 이 교수는 “후세가 일제에 저항한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변호를 자주 맡으면서도 특정 이념에 얽매이거나 정파에 속하지 않았던 것도 특이한 점”이라며 “후세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틀을 초월해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인권을 추구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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