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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거리낌없고 남의 말 들을 줄 알고 … 그러니 멋진 꽃할배!

중앙선데이 2013.09.07 00:00 339호 21면 지면보기
패션 브랜드들의 행사에 빠지지 않는 게 연예인이다. 아무래도 누가 다녀갔다고 하면 뉴스가 되고, 또 연예인들이 제품을 걸치고 오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광고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업체들은 그 시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톱스타나 평소 ‘패션 피플’이라 불리는 멋쟁이들을 초대하기 위해 섭외 작전을 벌인다.

스타일#: 패션 행사장의 원로 배우들

그런데 웬걸. 최근 작은 ‘이변’이 벌어졌다. 평균 나이 73세의 원로 배우들이 럭셔리 브랜드 행사의 메인 게스트로 초대된 것. 바로 예능 프로 ‘꽃보다 할배’의 주인공인 신구·박근형·백일섭 ‘할배들’ 말이다.

지난달 28일 구찌 측은 브랜드의 대표 상품인 ‘홀스빗 로퍼’ 탄생 60주년을 기념하며 이탈리아 슈즈 장인들을 한국으로 불렀다. 그들이 직접 손으로 가죽을 자르고 나무장식을 구부리는 과정 등을 시연하는 ‘하우스 오브 아티잔’ 행사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장인들은 모두 10대 때부터 구두 제작에만 한평생을 바쳐 온 외골수들. 브랜드 측은 이들의 인생과 할배들의 배우 인생이 닮았다는 데 착안, ‘구두 장인 대 연기 장인’의 만남이라는 의미로 원로배우들을 초대했다.

할배들이 뜬다는 소식에 패션 동네의 관심은 비슷했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행사장에 나타날까 하는 궁금증이다. 알아서 브랜드 신상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고 나타나주는 일반 연예인이 아닌 데다, “청담동 사거리가 어딘지 처음 알았고”(신구) “청담동은 알지만 술 먹으러 오는 곳”(백일섭)이라고 할 만큼 럭셔리·패션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할배들의 스타일 점수는 A학점이었다. 리넨 바지에 라운드넥 면티셔츠와 여름용 재킷, 거기다 헌팅캡 모자를 눌러쓰고 온 구야형(신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면셔츠에 면바지, 카디건으로 아메리칸 캐주얼의 기본을 지킨 일섭 할배는 물론이요, 아이보리 면재킷에 생지 데님을 짝지은 근형 할배까지 자연스러우면서도 멋스러웠다. 게다가 셋 모두 시커먼 정장 구두 대신 스니커즈를 신은 것도 놓칠 수 없는 포인트! 브랜드 측은 이 차림에다 모자·구두·스카프를 살짝 더하며 스타일링을 마무리했다.

돌이켜보면 방송에서도 이들의 여행 패션은 남달랐다. 느슨한 양복바지에 중절모를 쓴 점잖은 순재 할배, 화려한 아웃도어 재킷 차림에 베레모와 보잉 선글라스로 멋을 낸 신구 할배, 빨간 상의에 녹색 바지처럼 과감한 패션에 야구모자를 쓴 멋남 근형 할배, 반바지와 후드 티셔츠 차림에 백팩을 멘 일섭 할배의 모습은 이들이 왜 ‘꽃할배’라 불리는지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에게 ‘노년룩’의 비결을 물었다. “촬영할 때 코디(스타일리스트)가 있었어. 우리가 싸온 옷은 다 가방에 집어넣고 그 친구가 입혀주는 대로 그냥 하고 다녔지. 하하.” 그런데 재밌는 건 촬영이 끝난 뒤에도 그 옷들을 즐겨 입게 됐다는 것. 신구 할배는 “모자며 리넨 바지며 이런 간절기에 이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라며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패션의 패자도 모른다고 손사래를 치는 할배들이지만 패션 피플의 자격만큼은 충분히 갖췄구나 싶었다. 변화에 도전할 줄 아는 유연성, 그리고 전문가가 권유하는 대로 믿고 따르는 포용력이 진정한 멋쟁이의 제1조건이니 말이다. 이날 현장에서도 근형 할배는 “선생님, 이 로퍼에는 양말 벗으시는 게 좋겠어요”라는 말 한마디를 듣자 주저 없이 맨발을 택했다. 설사 귀찮고 어색한 일이라도 ‘이게 더 낫다’는 말에 한번 해보자는 심산으로 말이다.
나이 들어 멋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굽은 어깨나 불룩한 배를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이유는 익숙한 스타일을 바꾸기 꺼리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젊은 사람도 아닌데’라는 말 한마디를 변명거리로 삼으며 말이다. 이날 꽃할배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귀에 못이 박인 이 말이 또 한번 떠올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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