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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밑바닥 삶이 설마 내 몫이랴

중앙선데이 2013.09.08 01:47 339호 27면 지면보기
오스트리아 작곡가 알반 베르크(1885~1935)는 ‘제2차 빈악파’로 극적 표현과 격렬한 감정의 표출에 뛰어났다. 오페라 ‘보체크’ ‘룰루’가 대표작이다. [www.ota-berlin.de]
가끔씩 슬래셔 무비, 이른바 난도질 영화를 본다. 전기톱이나 칼로 사람 몸을 난자해 피와 내장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장면 앞에서 ‘이런 걸 왜 보지?’ 싶은데 끝까지 보게 된다. 폭력물이란 인간 본성의 잔인한 욕망을 대행해 주는 것으로 존재 의의를 찾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도질 충동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슬래셔뿐 아니다. 온갖 기괴한 고어물, 공포물, 좀비영화들이 마찬가지인데 가령 여러 남녀의 입술과 항문을 강제로 수술해 붙여 지네인간을 만드는 변태 의사의 이야기를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겠는가. 그런데 그 독일 영화를 끝까지 본다. 설마 그런 행위를 욕망하겠는가만 어떤 설명할 길 없는 쾌감이 존재하는 것. 아, 그게 바로 욕망이던가?

[詩人의 음악 읽기]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그것을 미학이론으로 설명한 바 있다. 오브제와 대비되는 애브젝트(Abject) 개념이 그것이다. 오브제가 어떤 구체적인 형상, 그리고 긍정성을 의미한다면 애브젝트는 파괴되고 배제된 것을 의미한다. 사전에서 ‘극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굴욕적인’으로 정의하는 애브젝트는 오브제라는 온전한 대상물에서 밀려난 어떤 것이다. 절망감과 비참함을 토양으로 하는 탓에 이 세상이 아름답고 조화로워 보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혹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은 오브제일까 애브젝트일까.

독일에 어떤 하급 병졸이 있었다. 이발사 출신인 그는 너무도 가난하고 못생겼고 주변머리가 없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놀림감으로 삼으며 끊임없이 모욕하고 가난 탓에 결혼식조차 못 올린 아내는 생활고에 진저리 치며 바람을 피운다. 둘이 낳은 아이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 비참한 신세를 면할 길 없다는 상징물 같다. 몇 푼 벌어 볼까 하여 어떤 의사의 논문용 실험동물 노릇도 알바 삼아 병행하고 있다. 자, 이런 삶이 소설이나 드라마 등의 작품 소재가 될까. 하물며 화사한 오페라 무대에 등장시킬 수 있을까.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가 바로 그 가련한 병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예술계에 표현주의 운동이 불던 때였다. 연극인들은 시간·장소·사건이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성을 거부했고, 화가들은 사실의 묘사를 벗어났고, 발레에서는 반주음악을 벗어던지던 시점이다. 표현주의 음악가들은 조성과 음의 조직성, 규칙성을 해체해 버렸다. 그러나 그 예술운동은 표현의 방법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실제 세상의 비참과 궁경, 그 현실을 담기 위한 고투가 바로 ‘보체크’ 같은 12음 기법 오페라였다.

오페라는 별도의 서주 없이 대뜸 ‘천천히 하게 천천히!’라는 낭창(朗唱)으로 시작된다. 보체크가 상관인 대위의 수염을 깎는 대목인데, 대위는 도덕적인 설교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결혼식 없이 동거하는 것은 교회법에도 어긋나고 사람 도리가 아닐세’ 뭐 이런 식의 훈계. ‘네, 옳습니다, 대위님’ 하는 말만 억양 없이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보체크. 하지만 결국 그는 이런 말을 토해낸다. “가난뱅이에게 무슨 도덕이 있나요?” 이어 예상할 수 있듯이 출구 없는 보체크의 삶은 아내 살해와 자신의 죽음으로 비참하게 마무리된다. 이 고통스러운 내용이 전 3막에 걸쳐 장장 1시간30분이나 이어진다. 특히 바리톤 보체크는 노래 이상으로 슈프레히슈티메(Sprechstimme)라고 부르는 낭독을 구사하는데 흡사 절규와도 같다. 관객들은 애브젝트가 뜻하는 ‘극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굴욕적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의 착란과 과잉과 혼돈을 함께 겪어야 한다. 요즘 고어물이나 슬래셔 무비를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있을까.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오페라로 꼽히는 터라 판본이 제법 많은 편인데 자타 공히 카를 뵘 지휘본으로 피셔-디스카우와 이블린 리어가 공연한 음반(작은 사진)을 최고로 꼽는다. 분노와 낙담을 오가는 디스카우의 음성이 정말로 무시무시하게 들린다.

신문을 읽다가 보체크 음반으로 손이 갔다. 놀랍기 그지없는 한국의 중산층 통계. 여전히 60%를 훨씬 상회하는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분류된다. 정말 그럴까. 아도르노가 비판적으로 성찰한 부르주아적 환상이 우리들 뇌리에 단단히 들어박힌 모양이다. 그런 환상의 결과 보체크 같은 작품을 감상할 때 대다수 관객은 보체크를 동정하는 위치에 선다. 대위나 의사 혹은 제 3자로 자기 동일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기업쯤에 근무하는 사람의 삶이 보체크를 동정할 위치에 설 수 있을까. 이발사도 병졸도 실험동물도 아닐뿐더러 공식적인 결혼을 치른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 따뜻하고 안락한 중산층의 꿈이 실현된 것으로 여긴다는 말인가. 애브젝트! 보체크의 음산한 외침이 울렁거리는 속에서 거듭 외친다. 착각하지 말라, 애브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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