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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권 넘긴 마오 “염라대왕 만날 약속” 농담만

중앙선데이 2013.09.08 02:10 339호 29면 지면보기
1976년 봄, 집무실에서 문건을 살피는 왕훙원. 문혁 초기 상하이를 장악했다. 1971년 린뱌오 사후 마오쩌둥은 36세의 왕훙원을 후계자로 발탁했다. 4인방 중 당내 서열도 제일 높았다. [사진 김명호]
1976년 4월 7일 오후, 마오쩌둥은 조카를 통해 중앙정치국에 건의했다. “저우언라이 사후 3개월간 대리총리 화궈펑은 직무에 충실했다. 당 제1 부주석 겸 총리에 임명함이 마땅하다.” 덩샤오핑 문제도 함께 거론했다. “당과 정부, 군대에서 차지하던 덩샤오핑의 모든 직위를 박탈했으면 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8>

말이 건의지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철저히 내치지 않았다. 묘한 지시를 첨부했다. “당적은 보유케 해라. 하는 걸 잘 지켜봐라.” 정치국 회의장에 침묵이 흘렀다. 4인방의 일원이며 한때 마오의 후계자였던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의 얼굴이 백지장으로 변했다.

정치국은 한발 더 나갔다. 덩샤오핑을 적으로 간주했다. 감옥에 처넣건, 패 죽이건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훗날 덩샤오핑은 당시를 회상했다. “이날을 계기로 4인방의 힘도 약해졌다. 인민들은 더 이상 왼쪽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여론이 돌아섰다. 혁명이라면 넌덜머리들을 냈다.”

총리와 당 제1 부주석에 선출된 화궈펑은 서열이 급상승했다. 4인방과의 관계 개선에 들어갔다. 4인방은 화궈펑을 적수로 보지 않았다. 당 원로들도 “긴장이 극에 달한 정치 분위기를 완화시킬 사람이 없다”며 겸손하고 소심한 화궈펑을 지지했다.

덩샤오핑이 자취를 감추자 전 세계 언론들의 오보가 잇달았다.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한 후에도 수십 년간 소설을 써댔다. “덩샤오핑은 1967년 주자파로 몰렸을 때처럼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위기에 대비해 비밀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직위가 해제된 날 베이징을 탈출했다. 정치국원이었던 광둥군구(廣東軍區) 사령관 쉬스유(許世友·허세우)의 전용기를 타고 광저우(廣州)에 안착했다. 며칠 후 예젠잉도 광저우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변두리에 있는 온천마을을 전전하며 4인방 제거계획을 세웠다.” 중국 물정 모르는 특파원들이 찻집과 골목에 나돌던 말들을 곧이곧대로 보도한, 이런 말들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덩샤오핑은 민첩했다. 면직 당일 밤,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통 들고 중앙 경위국(警衛局) 서기 왕둥싱(汪東興·왕동흥)을 찾아갔다. 마오의 경호실장 격인 왕둥싱은 옛 친구의 청을 들어줬다.

예젠잉(오른쪽)과 덩샤오핑. 1979년 겨울, 베이징.
“당의 규율을 준수하겠습니다. 화궈펑 동지를 제1 부주석과 총리에 선출한 주석과 당 중앙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제가 당에 남아있도록 윤허해 주신 주석께 충심으로 감격했습니다. 예전에는 총명했는데 점점 미련한 짓만 골라서 한다는 주석의 지적 명심하겠습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마오쩌둥은 왕둥싱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었다. “덩샤오핑을 안전한 곳에 격리시켜라. 자녀들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두지 마라.” 4인방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어서 방귀를 크게 한 방 뀌고 잠자리에 들었다. 표정이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베이징 시내 한복판, 유서 깊은 고가(古家)에 머물게 된 덩샤오핑은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됐다.

화궈펑에게 통치권을 넘긴 마오쩌둥은 앉아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을 때가 더 많았다. 5월 11일 심장발작이 일어난 후부터는 매사가 귀찮았던지 화궈펑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슬픈 농담만 되풀이했다. “염라대왕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장칭(江靑·강청)은 힘이 넘쳤다. 당과 군대의 선전기구를 동원해 마오쩌둥 사후에 대비했다. 덩샤오핑과 혁명 원로들 비판에 정력을 쏟아부었다.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보였다 하는 날엔 귀신도 모르게 행방불명이 되고도 남을 정도로 살벌했다.

젊은 시절부터 온갖 신산(辛酸)을 겪은 당 원로들은 핫바지가 아니었다. 부총리 왕전(王震·왕진)이 시산(西山)의 베이징군구 깊숙한 곳에 칩거 중인 예젠잉을 방문했다. 4인방을 대놓고 거론했다. 이날 왕전은 정곡을 찔렀다. “4인방은 없다. 주석까지 해서 5인방이 맞다.” 예젠잉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눈에 보이지 않게 보살폈다. 6월 10일 덩샤오핑이 왕둥싱을 통해 마오와 화궈펑에게 보낸 편지가 최근 공개됐다. “집사람이 안질에 걸렸습니다. 증세가 심해서 병원에 입원해야 합니다. 간호를 위해 가족 중 한 사람이 병실에 함께 기거했으면 합니다.” 마오는 선뜻 허락했다. 부인이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덩샤오핑은 살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지를 받았다.

7월 6일,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가 세상을 떠났다. 저우언라이 사망 6개월 후였다. 덩샤오핑은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7월 28일 3시 42분 53.8초, 베이징에서 100㎞ 떨어진 탕산(唐山)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24만2769명이 사망하고 하루아침에 4204명이 고아가 된 대형 지진이었다. 큰 변이 날 징조라며 전 중국이 들썩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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