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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세이프헤이븐

중앙선데이 2013.09.08 02:16 339호 29면 지면보기
이번에는 다를까. 1997년, 2008년의 위기에 이어 또 한 차례 쓰나미가 밀려오지 않을까 걱정되는 시기다. 여러 신흥국에서 경고음이 흘러나온다. 동네 건달에게 몇 번 맞은 기억 탓에 멀리서 그자의 목소리만 들려도 겁을 내는 꼴이다. 조건반사, 트라우마다.

이번에는 좀 다르다는 시그널이 있긴 하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이 사상 최저 금리로 발행됐다. 이후 외평채와 한국물의 가산금리도 덩달아 떨어졌다. 원화가치는 나홀로 강세기조다. 과거 한국을 버리고 떠난 이들이 이제는 다른 신흥국을 탈출해 한국으로 온다는 소식마저 들린다. ‘AA’ 신용등급의 안전자산으로 ‘세이프헤이븐(safe haven)’의 위치를 굳히고 있다고도 한다.

세이프헤이븐이란 말 그대로 ‘안전한 피난처’다. 비상사태, 금융위기 속에서도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 ‘안전자산’을 뜻한다. 원화가 대표적인 세이프헤이븐인 달러·엔·스위스프랑의 대열에 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밑의 ‘대체 안전자산(alternative safe haven)’쯤은 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이게 사실이라면 공부 못하던 학생의 놀라운 변신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맷집이 좋아져 면역력이 강해진 측면이 있다. 게다가 선진국에 이어 신흥국까지 덜 안전하거나 더 위험한 곳으로 전락했다. 단연 한국이 돋보일 수 있겠다. 양대 시장인 미국과 유럽도, 급부상하던 신흥국도 다 어려워졌다는데 놀랍게도 한국은 기록적인 무역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이 축복을 받은 나라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알고 보면 그게 중국이다. 무역흑자를 많이 내는 상대국 1위는 중국, 2위는 홍콩이다. 미국은 3위다. 지난 1~7월 미국에서 120억 달러의 흑자를 냈는데 중국·홍콩에선 4배에 이르는 488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중국으로 향하는 수출이 전체의 30% 남짓이나 된다. 중국이 우리에게는 버퍼이자 방파제인 셈이다. 인도·인도네시아가 주는 충격을 중국이 막아 준다면 한국은 조마조마하겠지만 그 뒤에서 안전을 확보할 가능성이 커진다.

최장수 은행장인 하영구 씨티은행장은 그게 반갑지 않은 듯했다. “씨티뱅크 글로벌 회의에서 아시아 시장을 설명할 때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Asia excluding Japan)’라는 표현을 썼는데 어느새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Asia excluding Korea)’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다른 신흥국의 성장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 그런 나라를 같은 카테고리에 넣고 아시아 시장을 설명하기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한국이 변동성 위험에서 벗어나는 건 좋은데 그 역동성과 성장성도 함께 잃어가는 것은 걱정스럽다는 말이기도 하다.

갈수록 활력을 잃는 안전시장, 날로 대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는 경제. 조금은 꺼림칙하지 않은가. 한국이 세이프헤이븐이 된다고 마냥 반길 수 없는 이유다. 국제금융센터 김익주 원장은 경고한다. “중국 경제가 연착륙하더라도 착륙은 착륙이고 충격은 불가피하다.” 나라의 위기 때 봉화를 올리라고 만든 곳의 수장 말이니 가볍게 듣지 말자. 1994년 미국의 출구전략 이후 97년 아시아 외환위기까지 4년이 걸렸다. 미국이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이란 출구전략을 시작하려 하자 신흥국에선 벌써 아우성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큰 놈이 올지 모른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다. 이번엔 다르다고 방심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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