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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빛고을과 함께한 사흘

중앙일보 2013.09.07 00:30 종합 30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지금의 신안군 안좌도). 고향 우리 집 문간에서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목포항에서 100마력 똑딱선을 타고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 섬이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74) 화백이 1962년 3월에 쓴 글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그가 지난 3일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김환기, 백년되어 고향에 돌아오다’라는 이름의 전시회로 다시 그토록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왔다.



 # 수화는 남도 끝자락의 섬에서 태어나 뭍으로, 다시 서울로 또 도쿄로, 파리로, 그리고 뉴욕에서 생을 마친 예술적 보헤미안이었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백 년 된 해이고, 아울러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그가 그리운 고향 땅으로의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수화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김광섭의 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년)라는 작품에서 파란 바다 빛깔의 점들이 촘촘히 찍힌 전면점화(全面點畵) 시리즈를 통해 삶과 죽음,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어 정녕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인지를 때론 속삭이듯 또 때론 우레처럼 우리 앞에 펼쳐놓지 않았던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섬에서 바라본 호수 같은 바다의 그 순정한 푸른 빛깔이 때론 촘촘하게 또 때론 성기게 펼쳐지는 그의 화폭은 그 자체가 햇빛에 반사돼 더욱 영롱하게 일렁이는 푸르디푸른 바다요 별과 달마저 삼킨 검푸른 하늘 그 자체가 아닐는지! 바로 이것이 수화 특유의 ‘환기블루’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가 마침내 그 빛깔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 전남과학고는 전남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다. 지난 4일 오후 그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연어처럼 돌아온 김환기 화백을 이야기했다. “너희들 중에는 그분처럼 섬에서 이곳까지 온 이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여기 머물지 말고 더 크게 더 멀리 나아가라. 그러나 끝까지 잊지는 마라. 네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고 언젠가는 빛이 되어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같은 날 어둠이 내려앉은 무등산 자락 의재미술관 야외에서 열린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전야제는 그 자체로 작품이었다. 야생의 산자락 군데군데 테이블을 놓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야생초 군락같이 모여 앉아 다소 거친 음식일지라도 정겹게 나누며 사뭇 배롱나무 붉은 꽃처럼 이야기꽃을 피운 것이 작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이다. 저마다 갖는 향기는 다르겠지만 바람결에 섞이며 어우러진 향취는 빛고을의 밤이 깊어갈수록 그윽한 차향에 담겨 더욱 진하게 우러난다.



 # 5일 늦은 오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를 남들보다 조금 일찍 관람하며 가장 눈길이 간 것은 ‘거시기 머시기’라는 주제를 풀어낸 주제관이었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쓴 ‘우리문화박물지’에 실린 예순네 가지 사물에 담긴 한국인의 문화DNA를 디자인적으로 풀어낸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이전에 사용해 온 물건들은 모두 ‘서명되어 있지 않은 디자인’이다. 그중에서도 달걀꾸러미는 특히 그렇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는 기능과 효용 면에서는 물론 미학적 관점에서도 참으로 탁월하다. 열 개의 달걀을 가지런히 담은 달걀꾸러미는 주위에서 가장 쉽고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던 짚을 성기게 엮되 반쯤 열린 상태로 만들어 달걀이 깨지지 않게 감쌀 뿐 아니라 여기 담긴 것이 달걀임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하지 않았던가. 정말이지 그 자체로 최고의 디자인 상품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사흘 동안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만난 김환기, 무등산 자락 의재미술관 야외에서 마주한 디자인 비엔날레 전야제, 그리고 디자인 비엔날레 주제관에서 다시 마주친 달걀꾸러미는 빛고을 광주가 예향(藝鄕)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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