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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샛별, 태양과 태평양 바람이 빚었답니다

중앙일보 2013.09.06 00:20 Week& 8면 지면보기
2 샌타바버라 인근에 위치한 ‘디어버그(Dierberg) 빈야드’ 와인저장고. 오크통에서 와인이 숙성되고 있다.


와인은 인생을 닮았다. 비옥한 땅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와인보다 거친 땅에서 익은 와인이 더 풍부한 맛과 향을 낸다. 달고, 시고, 쓰고, 맵고, 떫은,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강렬한 와인의 풍미. 이는 척박한 환경과 싸우며 힘든 시간을 살아낸 포도나무가 일생을 걸고 빚어낸 작품이다. 날씨가 너무 따뜻하면 달기만 한 와인이 된다. 너무 서늘하면 포도가 안 익어 신맛이 강해진다. 복합적이고 깊은 맛을 내려면 뜨거움과 차가움이 모두 필요하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와인의 90%를 생산한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과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질 좋은 와인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센트럴코스트 와인 지대를 가다



1 스월링(swirling)하는 장면. 와인을 따른 후 잔을 돌리는 것을 말하는데 와인이 공기와 더 많이 접하게 해서 본래의 맛과 향이 우러나게 한다. 스월링을 하고 나면 와인이 잔 안에서 흘러내리는데 이를 ‘와인의 눈물’이라 부른다.


캘리포니아 와인이라고 하면 흔히 나파 밸리나 소노마 카운티를 떠올리는데 , 나파와 소노마는 캘리포니아 노스 코스트(북부 연안) 지역에 속한다.



캘리포니아와인협회가 지난달 11일부터 17일까지 언론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해 센트럴 코스트(중부 연안) 지역 10여 개 와이너리를 찾았다. 샌프란시스코부터 샌타바버라까지 500㎞에 이르는 남북으로 긴 지역이다.



센트럴 코스트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와인 산지지만 역사는 오래됐다. 1700년대 선교를 위해 이곳에 온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미사에 쓸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옛날 수도사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만든 길이 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 현재의 ‘하이웨이 101’이다. 센트럴 코스트의 와이너리들은 바로 이 길에 있다.



신을 위한 포도주 생산이 시작된 건 300여 년 전이지만 인간을 위한 와인을 본격적으로 만든 건 30여 년 전이다. 와인 생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자신만의 와인을 꿈꾸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발명가, 음악인, 은퇴한 영화배우, 정보기술(IT) 전문가를 비롯해 프랑스의 꽉 막힌 와인 등급체계를 거부하는 프랑스 와인메이커까지 다양한 이들이 이곳으로 왔다. 이들 중 특색 있는 와이너리 5곳을 소개한다.



3 새들이 포도를 쪼아 먹는 걸 막기 위해 포도나무에 망을 씌워놓았다.
토머스 포가티 와이너리

(Thomas Fogarty Winery)




토머스 포가티(79)는 미 스탠퍼드대 의과대학 심장의학과 의사다. 심혈관 질환 관련 특허 170여 개를 소유하고 있는 유명 발명가이기도 하다. 의사로, 발명가로 이름을 떨친 그의 다음 도전은 와인이었다. 그는 1978년 스탠퍼드대가 위치한 팰로앨토 동쪽, 샌타크루즈마운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인너리를 만들었다.



이곳은 팰로앨토·마운틴뷰·쿠퍼티노 등 실리콘밸리 일대에 위치한 IT업체들의 이벤트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멀리 캘리포니아 해안을 바라보며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크고 작은 연회장이 구비돼 있다.



포가티 와이너리 바로 옆에는 1976년 ‘파리의 심판’으로 유명해진 리지 빈야드가 있다.



‘파리의 심판’은 블라인드 테스트(제조자 이름을 가리고 하는 테스트)에서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앞선 사건을 말한다. 리지 빈야드 와인(몬테벨로 1971)은 레드 와인 부문 5위를 했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던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은 “평가에 오류가 있다. 프랑스 와인들은 숙성이 돼야 제 맛을 내는데 테스트에 나온 프랑스 와인들은 너무 어렸다. 숙성되고 나면 미국 와인을 앞지를 것”이라고 항의했고 30년이 지난 2006년 재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재대결의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5위였던 리지 와인은 재대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사건은 미국 와인에 대한 선호를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다우 빈야드

(DAOU Vineyards)




“한국에도 다우라는 IT 회사가 있지요? 한국인들은 다우라고 하면 한국 회사라고 생각하더군요”



대니얼 다우(46)는 파소 로블스의 와인메이커다. 그는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형 조지와 함께 컴퓨터 네트워킹 회사를 창업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헬스케어 관련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당시 기업공개(IPO) 톱5 안에 들었다. “IT 회사로 성공했을 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와인 만들기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다우 형제가 자신들의 이름을 딴 와이너리를 만든 것은 2006년. 프랑스 출신인 어머니 덕분에 다우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와인을 맛보며 자랐다.



“와인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마 열두세 살 때쯤이었을 거예요. 진짜로 하고 싶은 게 IT와 와인 어느 쪽이냐고요?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물론 와인입니다.”



대니얼 다우의 연구실에는 4년 전 직접 만들었다는 소프트웨어가 가동되고 있었다. 물의 양, 포도의 수확시기, 당도, 블렌딩 결과 등 관련 데이터를 입력해 분석한다.



“IT와 와인메이킹을 결합한 거죠. 성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올해는 다우의 카베르네 소비뇽이 올해 미국 와인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4 카멜 시내에 자신의 와인 테이스팅 룸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 출신 와인메이커 리처드 오.
오터 코브 테이스팅 룸

(Otter Cove Tasting Room)




몬트레이 인근 카멜(Carmel) 시내 ‘트리하우스(Treehouse) 카페’라는 레스토랑 2층. 이곳에 와인 테이스팅 룸을 운영하는 이는 한국 출신 리처드 오(50)다. 그는 다섯 살 때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다. 새너제이주립대에서 컴퓨터&비즈니스를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엔 2004년까지 모기지 회사에서 일했다.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 오터 코브라는 브랜드의 와인을 만든 것은 9년 전인 2004년이다. 그에게 물어봤다.



-오터 코브는 어떤 와인인가.



“음식의 맛을 살려주는 와인을 지향한다. 한국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달라. 어떤 한국 음식이 어떤 와인과 어울릴까.



“불고기·갈비는 피노 누아와 어울린다. 돼지불고기는 시라와 어울릴 것 같다. 오징어볶음은 리슬링과, 파전은 샤르도네와 어울리고.”



-모기지 회사에 다닐 때보다 지금 더 행복한지.



“모기지 회사도 재밌었다. 지금도 좋다. 둘 중 어느쪽이냐면 지금. 요리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와인도 알게 됐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와인을 맛있게 마시는 걸 볼 때 가장 행복하다.”





라방투어 와이너리

(L’Aventure Winery)




“나는 순수주의자(purist)다.”



스테판 아소는 프랑스의 보르도 지역의 이름 난 와인메이커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꽉 짜인 와인 등급제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겠다며 96년 프랑스를 떠나 파소 로블스로 왔다.



“파소 로블스는 지중해성 기후와 비슷하다. 이곳의 흙은 라임스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라임스톤은 흙속의 수분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포도나무가 라임스톤을 찾아 땅 속 깊이 뿌리 내리고 수분을 흡수한다. 복합적인 와인의 맛과 향을 만들어 낸다.”



그는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나무가 적절하게 긴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좋다고 했다. 하지만 지나친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된다고 했다. 많은 와인메이커가 포도나무가 스트레스를 받도록 일부러 거친 환경을 조성하곤 한다. 가령 포도나무 옆에 잡초를 심거나 물을 주지 않는 것이다. 힘들게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일수록 깊고 풍부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나무가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아남는 데만 집중하느라 성장을 안 한다. 긴장은 괜찮지만 스트레스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밸런스다. 밸런스가 갖춰진 와인이야말로 즐거움을 주는 와인”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이국땅으로 건너온 이 프랑스 남자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로버트 파커 등 유명 와인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파소 로블스의 그랑 크뤼(프랑스의 최고와이너리에 주는 등급)’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멜빌 와이너리

(Melville Winery)




샌타바버라 인근에 위치한 멜빌 와이너리는 먼 옛날 바다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흙에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물이나 영양분을 머금기 어렵고 플랑크톤이 함유돼 있다. 1년 내내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다. 포도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서 이곳에선 포도밭에 거름을 준다. 물고기 오일이 거름으로 쓰인다.



“제가 어렸을 땐 이곳의 포도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서 무척 작았어요. 하지만 물고기 오일을 거름으로 주고 나선 포도나무가 훨씬 건강해졌지요.”



멜빌의 와인메이커 그레그 브루어의 말이다. 그레그는 원래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러다 샌타바버라 시내의 테이스팅 룸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와인을 알게 됐다. 샌타바버라 지역에 와이너리가 너무 늘어나자 지역 정부가 새로 문을 여는 와이너리들은 테이스팅 룸을 개별 와이너리에 두는 대신 샌타바버라 시내에 모아두도록 했다. 와이너리 주변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려는 차원이었는데 오히려 샌타바버라의 관광명소가 됐다. “주말에 예쁜 여자들도 만날 수 있고 와인도 마실 수 있고 해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어요. 그런데 와인을 알면 알수록 빠져들게 됐죠. 결국 교수직을 집어치우고 와인메이커가 됐어요.”



물고기 오일 때문인지, 바다 모래 때문인지 이곳의 와인에서는 바다 맛이 난다. 아주 독특하다.



‘멜빌 2012 이녹스(Inox) 샤르도네’. 스테인리스통에서 숙성시킨 이 와인은 물고기와 소금, 시트러스, 포도, 레몬 향이 느껴졌다. 그보다 더 마음을 끈 것은 ‘멜빌 에스테이트 2011시라-베르나스’ 였다. 시라 특유의 과일향은 덜했고 대신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긴 여운이 느껴졌다.





캘리포니아=글 박혜민 기자 , 사진 캘리포니아와인협회·프리랜서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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