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말 바루기] 그리고 나서

중앙일보 2013.09.06 00:10 경제 10면 지면보기
“6월이 오면 나는 온종일 그녀와 함께 향기 짙은 마른 풀 속에 앉아 있겠네. 그리고 나서 솔솔바람이 부는 하늘, 흰 구름이 지어놓은 눈부신 드높은 궁전을 바라보겠네.” “잣나무는 태어나서 200년 동안 계속 키가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1000년을 더 산다.” “두 번째 기도를 올리기 위해 엎드렸다. 그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그리고’라는 접속부사에 ‘나서’를 붙여서 쓰는 경우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음 사례를 살펴보자.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나서 그 일을 처리하자.” “그 영화를 아직 안 봐서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어. 보고 나서 내 생각을 말해줄게.” “그녀는 한참을 웃고 나서 내게 그 까닭을 말해주었다.” 예문의 ‘먹고 나서’ ‘보고 나서’ ‘웃고 나서’에서 ‘나서’는 ‘나다’라는 보조동사에서 활용한 것인데 그 앞에는 동사가 온다. ‘먹다’ ‘보다’ ‘웃다’는 모두 동사다. 그렇지만 ‘그리고’는 접속부사여서 ‘나서’ 앞에 올 수 없다.



 물론 ‘그리다’가 동사로 쓰인 경우라면 ‘-고 나서’의 형태가 가능하다. “도화지에 그의 얼굴을 그리고 나서 지워버렸다”에서는 ‘그리고’가 연필이나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의 동사이므로 ‘그리고 나서’로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나서’가 틀린 말이라면 어떻게 고쳐야 할까. 우선 ‘그리고’만 써서 말이 된다면 ‘나서’를 빼고 쓰면 된다. 처음 예문의 경우 ‘향기 짙은 마른 풀 속에 앉아 있겠네. 그리고 눈부신 드높은 궁전을 바라보겠네’로 해도 문맥이 통한다. 또 다른 방법은 “우선 우리 집에 가자.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자”처럼 ‘그러고 나서’로 쓰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고’는 ‘그리하고’가 줄어든 말인데 ‘그리하다’는 ‘상태, 모양, 성질 따위가 그렇게 되게 하다’란 뜻이다. 글머리 둘째 예문의 경우 잣나무가 200년 동안 키가 자라고 나서 그 후 1000년을 더 산다는 것이므로 ‘그리고’를 쓰는 것보다는 ‘그러고 나서’로 하는 게 의미가 더 명확히 전달된다.



김형식 기자



▶ [우리말 바루기] 더 보기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