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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사모님 주치의' 구속될 때까지 의료계는 뭐 했나

중앙일보 2013.09.05 00:33 종합 33면 지면보기
민경원
사회부문 기자
“사법부의 결정을 존중한다.”



 ‘여대생 청부살해사건’ 주범 윤길자(68·여)씨에게 허위·과장 진단서를 발급해준 혐의로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박모(54) 교수가 3일 구속됐다. 박 교수에게 형 집행정지에 필요한 진단서 발급을 의뢰하며 1만 달러를 건넨 혐의로 윤씨의 남편인 류원기(66) 영남제분 회장도 함께 구속됐다. 그러나 박 교수가 소속된 세브란스병원이나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는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병원의 입장은 “사법부의 결정을 기다린다”에서 “존중한다”로 고작 네 글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세브란스병원은 그동안 사법부보다 앞서 결정을 내리는 것에 난색을 표해왔다. 지난 6월 13일 서울서부지검에서 압수수색을 하자 바로 이날 박 교수에 대한 교원윤리위원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윤리위의 진행 속도는 더뎠다. 세브란스병원 측은 “교칙상 윤리위 내용은 모두 비공개”라며 “윤리위에서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나와야 징계위원회를 열 수 있다”고 답했다.



 결국 세브란스병원은 허위진단서 발급 의혹이 불거진 뒤 석 달 가까이 박 교수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제자리걸음을 했다. 하지만 이미 검찰은 협진에 참여한 동료 교수들로부터 박 교수가 독단적으로 진단서를 작성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상태였다.



 대한의사협회는 ‘합법적 탈옥’이란 비난을 받은 윤씨의 특실 호화생활이 언론에 알려진 지 사흘 만인 5월 29일 중앙윤리위원회에 박 교수와 신경정신과 최모 개인병원 원장을 제소했다. 그러나 “사법권이 없어 윤씨에 대한 의무기록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더 이상 속도를 내지 못했다. 7월 초 검찰에서 제공한 해당 서류를 검토했지만 아직까지 징계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9월 28일 예정된 정기 회의에서 다루겠다는 방침만 세웠을 뿐이다.



 박 교수는 7월 20일 열린 중앙윤리위원회의 청문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서면으로만 의견서를 제출했다. 윤리위는 박 교수를 상대로 다시 청문회를 열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미적거리는 동안 박 교수는 구속됐다. 전문가 집단인 의료계가 스스로 문제를 따져 결론을 내릴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국회에서는 일명 ‘사모님 방지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각 지방검찰청의 형집행정지 심의위원회에 의학 분야 전문가를 포함하고 종합병원 2곳 이상의 진단서를 제출토록 하는 게 골자다. 하지만 아무리 제도를 개선해도 의료계의 각성이나 자정노력이 없다면 엉터리 진단서를 이용한 ‘합법적 탈옥’은 근절되기 힘들 것이다.



민경원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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