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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동·서양 교육의 '용광로'

중앙일보 2013.08.26 01:08 종합 8면 지면보기
지난달 30일 난양공대 학생회관에서 학생들이 활기차게 토론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출신인 니코 다르마완(20·왼쪽 둘째)은 “어릴 때부터 싱가포르 정부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온 동남아시아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인구 500만 명의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교육 ‘허브(Hub)’로 떠오르고 있다. [싱가포르=이한길 기자]


21세기 들어 아시아 대학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영국의 대학평가기관인 THE(Times Higher Education)와 QS(Quacquarelli Symonds)사의 2004년 세계대학평가에서 100위권 안에 든 아시아 대학은 13곳이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19곳으로 늘었다. 그 선두에는 인구 500만 명의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있다. 싱가포르국립대(NUS)는 지난해 세계대학랭킹(QS 평가) 25위에 올랐다. 아시아 대학 중 홍콩대(23위)에 이어 둘째다. 미국의 명문주립대인 UCLA(31위)나 아이비리그의 브라운대(42위)보다 높은 순위다. 싱가포르 제2의 명문대인 난양공대(NTU) 역시 47위에 랭크됐다. 아시아 시대를 이끌 인재들은 결국 교육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다. 중앙일보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공동 취재팀은 지난달 말 아시아의 교육 허브(Hub)로 떠오른 싱가포르를 찾았다.

중앙일보-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기획 ⑤ '인재 허브'로 뜬 비결



정부 예산 21% 교육에 투자



 지난달 29일 만난 탄응치에(陳永財) 싱가포르국립대 부총장은 성장 비결을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꼽았다.



 싱가포르국립대의 지난해 예산은 약 1조8000억원. 서울대(8000억원)의 두 배가 넘는다. 이 중 70% 이상을 정부가 대주고 있다. 난양공대도 비슷한 수준의 지원을 받는다. 다음 날 만난 프레디 보이 난양공대 부총장도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이 오늘의 난양공대를 만든 원동력”이라며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정부가 지원한 연구비만 1억6000만 달러(약 1800억원)다. 정부 지원이 많아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올해 전체 예산의 21%를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15%)보다 훨씬 높다. 땅도 자원도 없는 싱가포르에서 ‘인재가 곧 자원’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지원 덕분에 주변 국가 인재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싱가포르로 몰려들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하고 있는 외국인 학생은 8만4000명(2012년 기준)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베트남·말레이시아 등에서 우수한 학생을 발굴해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한다. 조건은 대학 졸업 후 최소 3년을 싱가포르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양공대 캠퍼스에서 만난 경영대 3학년 니코 다르마완(20)도 이런 경우다. 인도네시아 국적인 그는 싱가포르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고등학교 때부터 수업료와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다. 그는 “동남아시아 수재들 중엔 싱가포르로 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전했다.



 2007년 싱가포르국립대에 부임한 김상호(생명공학과) 교수는 “학생들의 생활수준은 미국 유명 대학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도 싱가포르의 장점이다. 싱가포르의 초·중·고에선 학생들에게 현지어(말레이어·타밀어·중국어)와 함께 영어를 필수로 가르친다. 난양공대 조남준(재료과) 교수는 “외국인 교수와 학생들이 생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평가했다. 싱가포르국립대는 전교생의 3분의 1이 외국인이다. 난양공대는 교수진의 절반이 외국인이다.



주변 국가 학생들 끌어들여



 싱가포르의 대학들은 철저히 실용주의를 추구한다. 취재팀이 만난 대학 관계자들의 입에서 대학의 이상이나 교육이념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은 듣기 힘들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싱가포르 대학은 연구 성과와 경쟁을 중요시하는 미국식 시스템과 수업 및 개별지도에 큰 비중을 두는 영국식 시스템이 섞여 있다. 학생들의 강의평가 점수는 교수 업적평가에 반영한다. 대부분 대학들이 강의평가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해외 대학과의 제휴에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싱가포르국립대는 2005년 미국 듀크대와 공동으로 싱가포르에 의학전문대학원을 세웠다. 난양공대는 미국 MIT와 2800억원 규모의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0년 설립된 싱가포르경영대(SMU)는 개교 당시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MBA)의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그러나 단순히 서구 대학을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취재팀이 방문했을 때 싱가포르국립대에선 NUS-예일 인문교양대학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3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예일대(1701년 개교)가 해외에 세우는 첫 캠퍼스다. 강의는 두 대학의 교수진이 함께 맡는다. 탄응치에 부총장은 “그동안 대학은 서양철학 등 서구의 지식만을 가르쳤다”며 “앞으로는 중국·인도 등 아시아의 지식과 철학을 함께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아시아의 철학을 교육한다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올해 첫 신입생 157명을 뽑는데 130개국에서 1만1400명이 지원했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서양 대학 모방 넘어 대안 제시



 싱가포르의 사례를 다른 아시아 국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싱가포르를 교육강국으로 이끈 두 가지 비결, 즉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유연한 사고가 아시아의 대학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대학의 랭킹과 연구실적, 국제화는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학은 자유로운 지성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공간이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창의성도 바로 이런 자유로운 사고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대학을 상상력과 창의성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싱가포르 대학들과 한국 대학들이 아시아 시대를 맞아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과제다.



싱가포르=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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