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념·자본 풍파 뚫고 유일하게 살아남다! 우리네 삶터의 원형질

중앙선데이 2013.08.24 00:23 337호 22면 지면보기
2003년과 2005년 두 번에 걸쳐 개성을 다녀왔다. 하루 일정인지라 출국과 입국을 두 차례 겪는 진기한 경험이었다. 간단하지만 긴장된 입국신고를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른 지 10여 분 지나니 도착이란다. 판문점에서 8㎞ 거리이므로 당연한데도 다들 마냥 신기할 뿐이다. 부모님 고향이 평안도이고 처갓집 고향이 개성이라서 예전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북한 땅 고향길이 이렇게 코앞이라니….

최명철의 집 이야기 <25·끝> 개성 옛집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말 충절을 지킨 삼은(三隱) 중 가장 어린 탓에 조선 초기를 감내했던 야은 길재(1353~1419)의 장탄식이 들리는 듯 보기에도 암울한 개성의 풍경이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로 조성된 공업지구의 활기찬 모습과는 다르게 온통 무채색인 개성 시가지는 방문객의 시선을 당황하게 한다. 평양 간 고속도로에서부터 자남산(子男山) 정상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까지의 통일거리는 양 옆에 늘어선 시멘트 색깔의 고층 아파트들과 더불어 암담하다. 아기자기한 우리나라의 지형과는 무관하게 뻗어있는 일직선 도로나 획일적인 아파트의 수직선은 예전의 산천을 간데없게 만들었다. 그나마 반갑게 보이는 남대문도 잠시 그곳을 경계로 개성 성안마을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한다. 오기 전 열심히 사전조사를 거쳐 꼭 많은 풍경을 담아 오리라 다짐했던 ‘개성의 집’의 원형은 보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1 1920년대 개성 선죽교 2 내성 구역 골목 ©Nicor/WikiCommons
2층 기와집이 줄지어 서있던 천년 도시
천년 전 고려의 도읍지 개성(開城)은 한자 뜻 그대로 ‘열려 있는 도시’다. 실크로드의 연장인 서해안 뱃길의 거점이자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 등지까지 왕래하던 국제 무역도시였다. 수심이 깊어 원양함이 들어올 수 있는 벽란도에는 한 해 1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다녀갔다. 이곳 예성강(禮成江)은 글자대로 ‘예절을 이루는 강’으로서 국제교류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 한강·임진강·예성강 등 한반도 내륙의 3분의 1 지역에 뱃길이 닿는 삼강합수(三江合水)의 요충지로서 물산이 풍부한 풍천(豊川) 터이기도 하다.

벽란도에서 개성의 서대문인 선의문(宣義門)까지 17리 길에는 2층짜리 기와집이 줄지어 시가지를 형성했다. 집집마다 여섯 자가 넘는 처마가 저잣거리를 덮고 있어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시전회랑(arcade)의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거란족의 침입으로 뒤늦게 군사용 성채를 구축한 개성은 만월대를 중심으로 하는 황성 구역과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내성(반월성) 구역, 그리고 송악산·부흥산·용수산·오공산의 사신사(四神砂)로 둘러싸인 나성(羅城)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송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으로서 고려는 이처럼 도성 건축에서도 우리나라 지형에 맞는 풍수이론을 발전시켜 황성체계를 완성했고 이후 조선시대 도읍지인 한양에서도 응용하게 되었다.

‘개성의 집’은 사대문 안 내성 구역에 집중돼 있다. 두문동(杜門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선비처럼 내사산에 안온하게 둘러싸여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와집 군상을 보면 바깥 세계의 무상함과 상관없이 천년 전 기품이 서려 있다. 몇몇 솟구쳐 올라있는 근대 건축물을 제외하면 역사의 정지 화면처럼 산천이 의구하게 되살아날 것 같다. 남대문을 지나 과거 시전이 펼쳐지던 주 가로인 남대가(南大街)는 만월대가 있는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까지 이어진다. 송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백천(白川)은 남대가 이면길을 따라 흐르고 골목길 작은 개천들은 집 앞의 낙갓줄(집 앞 또는 집안으로 이어지는 실개천. 먹는 물 외에 집에서 사용하는 생활용수의 물줄기이자 빗물의 자연 배수로로 기능하는 전통적 친환경 물활용시스템)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러운 기와집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이룬다.

우리나라의 도읍지는 다섯 곳이고 이 중 통일 수도는 세 곳이다. 삼국시대 평양과 부여가 있고 신라의 경주, 고려의 개성, 그리고 조선의 한양이 각기 400~500년이라는, 세계사에 드문 장기집권의 수도다. 이 중 부여와 경주는 과거의 도읍지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고 평양은 이념의 수도로, 한양은 자본의 수도로서 확장되어 현재는 남과 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예전 형상대로 현존하는 개성의 집은 이념과 자본의 파도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보물이자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3 자남산 김일성 동상에서 바라본 통일거리. 보이는 봉우리가 용수산이다. ©Nicor/WikiCommons 4 개성 남대문 ©moravius
세계유산 등재 … 되살릴 길 찾아야
지난 6월 2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진행된 유네스코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북한이 신청한 개성 역사유적지구를 세계 유산으로 등재했다. 5개의 성벽 구역,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남대문,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태조 왕건릉 외 7개 왕릉 등이 포함돼 있다.

이는 북한에서 신청한 낱개의 유산에 대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개성의 집과 도시’의 결정적인 유산 가치에 관해서는 접근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1987년)나 체코의 프라하(1989년), 중국의 리장(1997년) 등은 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집과 도시, 나아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같은 범주 속에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이제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 부를 누리며 시민들의 삶과 문화 또한 주목받고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에 따라 2002년 11월 북한의 개성공업지구법이 발효됐다. 이로부터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토지 및 인력과 결합할 수 있게 됐다. 규정상 50년 임대한 2000만 평 토지에는 800만 평의 공업지구와 배후 생활구역 600만 평 등이 있고, 내성 구역을 포함한 기존 시가지 400만 평도 남한의 사업 대상지에 속해 있다. 정치 문제로 늘상 말썽인 개성공단에는 최근까지 평균임금 150달러의 근로자 5만여 명이 123개 제조업체(섬유업체 72개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나마 중국 공장의 평균임금 250달러보다 싸게 책정돼 있기 때문에 다행이란다. 과연 천년 전 황제국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이루어졌음직한 해법일까.

땅은 말이 없다. 산천도 의구할 따름이다. 북한이야 말할 바가 없겠지만 세계를 향해 한반도의 족보를 밝혀야 할 남한이 기껏 선택한 자본과 기술의 결과물로서는 너무 개념이 없다.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이제라도 ‘개성의 집과 도시’를 복원해야 한다. 열려있는 도시로서, 국제 무역도시로서, 천년의 역사도시로서, 오백 년 도읍지 황제 도시로서, 자연과 더불은 생태도시로서, 우리나라 집과 마을의 원형질로서, 그리고 살아온 사람들의 수많은 삶과 문화와 이야기들로서 꽉 차게 복원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나라의 집과 도시의 미래가 열릴 것이다.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