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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51세, 최고참 91세 … 강원FC 응원에 빠진 '동네 형님들'

중앙일보 2013.08.21 00:37 종합 27면 지면보기
강원 FC는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지만 ‘우추리 어르신’의 애정은 변함이 없다. 18일 인천과의 경기에서 강원을 응원하고 있는 ‘우추리 어르신’. [강릉=김진경 기자]


축구장의 응원은 과격하다. 깃발을 흔들고, 웃통을 벗어젖히고 고함을 지르는 젊음의 향연이다. 그러나 젊은이의 전유물은 아니다.

국내 최고령 서포터 '우추리 어르신'
전 부치고 막걸리 … 경기 땐 잔칫날
난생처음 비행기 타고 제주 원정도
"소리 확 지르고 오면 가슴 뻥 뚫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마을 공동식당. 18일 오후 5시가 되자 백발의 할아버지·할머니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프로축구 강원 FC의 상징색인 오렌지색 조끼를 맞춰 입은 국내 최고령 서포터 ‘우추리 어르신’이다. 이날 오후 7시 강릉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프로축구 경기에 응원을 가기 위해서였다. 많을 땐 40명을 넘지만 이번엔 16명이 모였다. 응원단 막내인 51세 신용승씨는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느라 바쁘다. 91세로 최고령인 권태남 할머니는 지난해까지 열성 멤버였지만, 올해 건강이 나빠져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 강원 FC의 공식 서포터스 이름은 나르샤다. 이를 빗대 이들을 ‘위촌리 나르샤’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단 관계자들은 편하게 ‘우추리 어르신’이라고 한다. ‘우추리’는 위촌리의 향토 발음이다.



 우추리는 조용한 마을이다. 촌장을 모시는 유교 전통이 조선시대부터 지금껏 이어져 온다. 세상과 비껴 살던 이곳이 2009년 강원도에 프로축구단이 생기며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단체로 소액 주주가 된 것이 계기가 돼 축구 응원에 푹 빠졌다. 함영진(52) 이장의 주도 아래 홈 경기는 물론 원정 경기 응원에도 나섰다. 원정 경기를 갈 때는 전날부터 전을 부치고, 버스 안에서 먹을 막걸리도 준비한다. 경기가 열리는 날은 마을 잔칫날처럼 돼버렸다.



권민정 강원 FC 홍보과장은 “원정 응원 갈 때면 멀미도 많이 하시고, 소변 때문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하지만 공식 응원단 나르샤보다 우추리 어르신들이 더 많이 원정을 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강릉에 축구팀이 생긴 뒤 직접 경기를 보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응원석에서 소리 확 지르고 오면 가슴이 뻥 뚫린다”고 입을 모았다.



 함 이장은 “원정 응원 길에 다른 농촌 마을은 어떻게 사는지 둘러보기도 했다. 축구 응원을 다니며 견문을 넓힌다. 지난해에는 아예 마을에서 대형 버스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2009년에는 회비를 걷어 제주 원정까지 나섰다. 마을 어르신 중 상당수가 이때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다. 홈 경기 응원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고, 원정 응원도 1년에 15번 정도 간다.



 권 과장은 “80대 할머님이 ‘누구누구는 요즘 컨디션이 안 좋다’며 후보 선수의 몸 상태까지 꿰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최근 응원단 회원인 김승기 할아버지가 암 투병 끝에 향년 80세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었지만 주말마다 홈·원정 응원을 거르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몸조리를 잘해야 하는데, 말려도 응원을 갔다”며 안타까워했다. 임은주(47) 강원 FC 사장은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어르신들은 응원하는 모양새도 다르다. 권오준(77) 할아버지는 “다 자슥(자식) 같지. 경기에서 졌다고 고개 푹 숙이고 인사하러 오면 안타까워”라고 했다. 권 과장은 “염소탕을 만들어 선수단에 전해 주시기도 한다”며 “우리 팀이 계속 질 때 관중이 다 욕하는데도 할머니·할아버지들은 경기 전에 그라운드 쪽으로 막걸리나 소주를 뿌리면서 고사 같은 걸 지내며 승리를 빌어주신다. 우리가 졌는데도 선수들 버스로 찾아와 박수를 쳐주셨다. 이분들도 판정에 불만은 있지만 거칠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신다”고 말했다. 정치적 이유로 응원을 거부한 붉은악마나, 지나친 열정으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일부 프로구단 서포터가 배워야 할 모습이다.



 강원의 초대 사령탑 최순호(51) 감독과 최근 해임된 김학범(53) 감독은 구단을 떠난 뒤에도 우추리를 다시 찾아 인사를 할 정도로 유대가 깊다. 나르샤 회원들은 어르신들을 위해 해마다 우추리로 봉사활동을 간다. 강원 FC는 2부리그로 강등될 걱정을 할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다. 하지만 세대를 하나로 묶어주고, 지역 어르신들에게 활력을 준다. 이것만으로도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강릉=김정용 기자

사진=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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