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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출생의 비밀

중앙선데이 2013.08.17 00:24 336호 30면 지면보기
초등학교 때다. 학교를 마치고 왔는데 집 앞에 크고 멋진 검정 세단이 한 대 세워져 있다. 무슨 일이지? 마루에는 차의 주인인 듯한 중년의 부부가 어머니와 마주보고 앉아 있다.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것이다. 중년의 부부는 나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는다. “이 아이가 상득이군요?”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인다. “상득아, 인사 드려라. 네 친부모님이시다.”

어렸을 때 주위 친구들에 비해 너무나 평범했던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내 부모의 자식이 아니다. 내 친부모는 전혀 내가 모르는 사람들, 어쩌면 엄청난 부자이거나 다른 나라의 왕족 혹은 초능력을 가진 외계인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그만둔 것은 어느 여름, 마루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 내 옆에서 왼 팔을 이마 위에 올려놓은 채 주무시는 아버지를 본 후였다. 나도 꼭 그렇게 하니까. 나는 꼼짝 못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란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번 여름 휴가 때 아내와 함께 TV 드라마를 보다가 ‘출생의 비밀’이 어린아이의 철없는 상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단골 소재란 사실을 발견했다. 당연히 나는 아내에게 잘난 체했다. “우리나라 TV 드라마를 다섯 글자로 줄이면 뭔 줄 알아? 출, 생, 의, 비, 밀.” 내 예상과 달리 아내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래서요?” 오히려 내가 놀란다. “그래서라니? 놀랍지 않아? 이 첨단의 21세기에 ‘출생의 비밀’이라니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아내는 상상 속 친부모처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는다. “현실적이죠. 너무 현실적으로 2013년 우리 사회를 반영한 거죠. 출생의 순간에 인생의 모든 것이 프로그래밍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우리 사회는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훨씬 결정적인 사회잖아요. 출생의 비밀이 아니고는, 그러니까 내 부모가 달라지지 않고는 취업도 결혼도 성공도 신분상승도 있을 수 없다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 같은 거죠.” 아내도 자신의 흥분을 느꼈는지 잠시 호흡을 고른다.

“당신도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비행운』 읽었죠? 거기 ‘서른’이란 작품에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오잖아요. 새벽부터 밤까지 하얀 얼굴을 하고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주인공이 하는 생각.”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든가?”

“그래요. 바로 그 문장. 그 문장이 ‘출생의 비밀’을 말하는 거죠. 우리 아이들은 자라 우리가 되겠죠. 겨우 우리가 되겠죠. TV 드라마에 나오는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없으니까.”

“정말 우리 아이들에겐 ‘출생의 비밀’은 없는 거야?”

아내 눈이 똥그래진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김상득씨.”

“정색하며 화내는 것 보니 뭐가 있긴 있나 보네.”

있긴 뭐가 있겠는가? 나는 씩씩거리는 아내를 피해 슬그머니 거실로 나온다. 거실에서 책을 보던 녀석들이 여름 오후의 금빛 졸음에 잠깐 낮잠이 들었다. 아이들도 어린 날의 나처럼 ‘출생의 비밀’을 상상했을까? 그랬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출생의 비밀이 아니라 생의 비밀이다. 어떻게 태어났든 우리는 자기 앞의 생을 살아야 한다. 이왕이면 즐겁게.

나란히 누운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왼팔을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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