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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없어 내가 의대 공부" … 시흥동서 38년 무료 왕진

중앙일보 2013.08.17 00:50 종합 17면 지면보기
전진상 의원 배현정 원장(왼쪽)이 동네 아이와 장난을 치고 있다. 그는 전진상 의원에서 1975년부터 지금까지 약 39만 명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제1회 '성천상' 수상 벨기에 출신 배현정 원장
간호사로 한국 와 소록도 가려했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판자촌 봉사 권유

“이사한 집은 좋아요? 전에 살던 반지하 집은 곰팡이 왕국이었잖아요. 이번 장마는 처음으로 곰팡이 없는 곳에서 지내겠네요.”



 지난 7월 1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아파트. 할아버지 유모(80)씨와 할머니 조모(77)씨가 앉아있는 거실 소파엔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파란 눈의 덩치 큰 푸근한 할머니 의사 배현정(67·본명 마리 헬렌 브라쇠르) 원장의 왕진이 있는 날이다.



왕진 가방 항상 4개 들고 다녀



 배 원장은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할머니 조씨의 쭈글쭈글한 팔에서 피를 뽑았다. 두께가 3㎝인 차트부터 범상치 않다. 모서리에는 손때가 까맣게 묻어 있었다.



1994년 7월부터 사용한 19년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첫 장엔 자녀들의 생년월일이 빼곡하게 적힌 가계도가 그려져 있다. 가족까지 챙기는 그만의 종합의료관리 서비스다. “왕진 가방만 네 개예요. 혈압계, 채혈도구 등이 들어있는 기본 가방에 수액·드레싱 도구 가방을 하나씩 챙겨야죠. 하나는 차트로 가득 차 있어요.”



 전날 배 원장은 유씨의 아들에게 전화를 했단다. 안부 인사와 함께 노부부의 상태를 묻기 위해서다. “동네 노인들이 큰딸로 생각해요. 왕진을 하면 자연스레 상담까지 하게 돼죠.”



 한 집을 왕진하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가량. 할머니 조씨에 전하는 그의 말엔 마지막까지 애정이 넘쳤다. “운동 많이 해야 해요. 만약 요양원 가게 되면 남녀가 따로 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 사랑하는데 헤어지면 슬프잖아요.”



 배 원장은 올해 JW중외그룹이 제정한 ‘성천상’ 제1회 수상자다. 생활 형편이 안 좋은 이웃들에게 38년간 의료봉사를 해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판자촌이던 시흥동에 배 원장이 들어와 ‘전진상(全眞常) 의원’을 세운 건 75년이다. 지하 1층·지상 3층의 빨간 벽돌 건물. 그때부터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흥동 토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실제 이 일대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들이 몰려 있는 골목길 사이에 위치한 의원은 얼핏 병원이라기보단 가정집 같다. 내부도 여느 병원과 다르다. 지하 1층엔 지역아동센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환자 자녀나 생활이 어려운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이 방과 후 공부를 하며 지낸다. 2~3층엔 진료실과 말기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



 조그만 동네 병원 같지만 전진상 의원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는 결코 작지 않다. 서울대병원·서울성모병원 등 대형 병원 의사 50여 명이 매달 봉사를 하러 온다. 배 원장이 1차 진료를 하면 비뇨기과·정형외과 등 전문의들이 2차 진료를 하는 식이다. 병원에 오기 힘든 노인 50여 명에겐 배 원장이 직접 매주 목요일 순번을 정해 왕진을 간다. 직장이 있는 환자들을 위해선 매주 3차례 야간진료를 한다. 밤 10~11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왕진비는 받지 않고 저소득층에겐 무료로 진료한다.



 일반 병원과 다른 ‘가족 분위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환자들은 의사를 만나기 전 사회복지과에 들러 가족등록을 해야 한다. 이때 가족관계·경제사정 등에 대한 상담이 이뤄진다. 차트마다 환자들 가계도가 그런 과정을 거쳐 그려진다. “처음부터 단순 의료사업이 아니라 의료 사회복지사업을 하려고 했어요. 반지하 방이 건강을 해칠 수도 있고, 자녀가 있어도 생계 문제로 부모 간병이 어려운 경우도 있어요. 이들을 위해 직업알선도 하고 법률상담도 하는 거죠.”



활짝 웃고 있는 배현정 원장. 그는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흥동 토박이다.
 의원 안에선 의료분야 외 50여 명의 봉사자가 호스피스 환자와 지역주민을 위한 음악치료·색채치료 등을 제공했다. 이런 전진상 의원의 종합적인 서비스를 두고 연구가 이뤄지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꾸준함이다. 전진상 의원을 거친 환자들은 38년간 약 39만 명에 달한다. 이들의 차트만 해도 한 방에 꽉 들어찬다.



 배 원장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46년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 남부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무렵 자연스레 평생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처음엔 수녀가 되려다 평신도로 사회에서 봉사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남자친구도 있었고, 부모님도 결혼을 하기를 바랐는데 다 뿌리쳤죠(웃음).”



 대학에선 어디서든 봉사를 할 수 있는 간호학을 전공했다. 이후 국제가톨릭형제회를 통해 72년 한국땅을 밟는다. 한국어도 제대로 몰랐던 26살 때였다. “전쟁을 겪은 나라란 것 외엔 잘 몰랐던 한국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로 가려 했거든요. 그런데 다른 한국 회원들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죠.”



 시흥동으로 이끈 건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이다. “소록도로 가려고 고민하던 중 김 추기경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요즘 시골에서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데 대부분 변두리에 판잣집 하나 짓고 산다. 이들과 함께 살며 봉사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할아버지라 불러”



 김 추기경의 조언에 74년 세 명이 의기투합했다. 유송자 사회복지사, 최소희 약사, 그리고 배현정 원장 이렇게 세 명의 조합이다. 지금까지 함께 살며 전진상 의원을 운영하는 동료다. ‘평생 동지’인 셈이다. 세 사람의 만남은 사회복지사업과 의료봉사의 종합 시스템 그 자체였다.



 1년간 준비를 거쳐 75년 122(37평)짜리 가게를 구입했다. “모든 게 열악했어요. 결혼도 안 한 여성들이 판자촌에 모여 살며 봉사를 하는데 오죽했겠어요.” 지금은 주변이 주택가로 돼 있지만 당시는 주변이 대부분 논밭이었다. 쥐들이 많던 슬레이트 판잣집에서 외상으로 쌀을 꾸면서 봉사를 했다. 이런 그들을 김 추기경은 자주 찾아 응원했다고 한다. “저희는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차라리 수도자면 더 사회에서 보호를 받을 텐데 그렇지 않고 힘들게 봉사를 한다고 우리를 격려했죠. 추기경께서 선종하실 때 마음 같아선 우리 호스피스 병동에 모시고 싶었어요.”



 6년이 지난 81년 어느 날, 점점 환자들이 늘어나자 상주 의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누군가 의대를 가자고 했어요. 저일 줄 몰랐죠. 다른 두 분은 대입 학력고사를 쳐야 하는데 저는 외국인이라서 정원외 편입이 가능한 거예요. 이 나라에 와서 봉사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졸지에 공부까지 하게 된 거죠(웃음).” 의대 공부와 병원 일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 길로 82년 중앙대 의대에 편입했다. 당시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한국말도 어렵고 프랑스어권에서 살았기 때문에 영어도 편하진 않았어요. 한자가 많은 의료법규 과목은 암호해독이었죠. 중앙대에서도 ‘받아는 주지만 졸업은 당신의 문제다’라고 했어요.” 공부를 하면서도 봉사는 놓지 않았다. 저녁엔 전진상 의원에서 예방접종을 하고, 낮엔 중앙대에서 의학공부를 해 나갔다. 그야말로 주독야경(晝讀夜耕)이었다.



 중앙대 졸업 후엔 더 전문적인 의료를 배우기 위해 가톨릭대 병원 가정의학과에서 실습의로 일했다. 계속 남아 교수가 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단다. 상주 의사 체제를 갖추며 의원은 점점 자리를 잡아갔고, 후원회도 조직됐다. 88년부터는 말기암 환자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고 호스피스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가톨릭대 가정의학과 후배로 있던 정미경 의사가 합류하는 등 뜻을 같이하는 동료와 봉사자도 늘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것들이 변화해 갔지만 그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75년부터 해온 왕진을 지금도 계속 다니고 밤늦게까지 환자를 돌본다. 일이 끝나면 기도를 하고, 한국 드라마를 다른 동료들과 감상할 때는 영락없는 보통 할머니 모습이다. 유일한 사치는 취미로 하는 수영이라고 했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전진상 의원이 의료복지서비스의 한 모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의료봉사 38년 베테랑의 마지막 언급의 여운이 크다.



“심장병이나 당뇨 환자 같은 경우 집 환경이 치료의 핵심이에요. 이를 알기 위해 환자와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죠. 하지만 현실은 환자가 1년 내내 의사 얼굴 한 번 못 보는 경우도 많아요. 다른 의료계 분들도 우리처럼 왕진을 다니고, 가족기록을 만들려 하지만 인력이 적어 못한다고 해요. 아쉬워요.”



글=이상화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JW중외그룹 설립자 이기석 사장 뜻 기려



◆성천상=JW중외그룹의 공익재단인 JW중외학술복지재단이 올해 제정한 상이다. 의료봉사활동으로 귀감이 되는 의료인을 발굴할 계획이다. 상금은 1억원. 수상자 선정은 주요 의료단체, 기관으로부터 후보자를 추천받은 뒤 이성낙 가천대학교 명예총장 등 전문가들의 최종 심사를 통해 이뤄진다. 성천(星泉)은 JW중외그룹 설립자 고 이기석(1910∼1975) 사장의 아호다. 이기석 사장은 1945년 조선중외제약소(현 JW중외제약의 전신)를 창업했다. 제약구세(製藥救世)가 창업 이념이었다. 59년 당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수액제를 국산화하는 등 치료의약품 개발에 전념했다. 69년엔 한 환자의 신장이식 수술을 위해 공장의 모든 생산라인을 중단하고 신장 투석액 인페리놀을 개발해 국내 최초 신장이식 수술에 기여하기도 했다. 타계 이후인 98년 대한민국 창업대상을 받았다.



 JW중외제약은 현재 퇴장방지의약품 636개 중 108개를 생산하고 있다. 고인의 창업 이념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한다. 퇴장방지의약품은 수익성이 낮더라도 제조사가 마음대로 생산을 중단하지 못하도록 지정한 중요 의약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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