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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칼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중앙일보 2013.08.17 00:04 종합 25면 지면보기
여수빈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4학년
지난 14일은 ‘세계 위안부 기림일’이었다.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실태를 세상에 처음 알린 날이다. 이날 비단 한국뿐 아니라 일본·대만·미국 등지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몇 년 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벌어지는 수요집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우비와 우산을 챙겼는데도 옷은 금세 젖었다. 하지만 노란 조끼를 차려입으신 할머니들은 강경한 어조로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수요집회가 1000회가 넘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집회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건만 그날도, 그리고 오늘까지도 일본대사관의 철문은 굳건히 닫혀 있다. 20년째 열리지 않는 그 문 밖에서 수요일마다 모이는 할머니들의 수는 점점 줄어간다. 지난 11일 이용녀 할머니가 별세함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57명으로 줄었다. 그나마도 평균연령이 87세에 이른다. 할머니들은 당신들의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셨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잊히는 것이라고.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몸으로 겪지 않은 세대에게 역사란 참 막연해지기 쉽다. 학교 수업에서 ‘집중 이수제’가 시행됨에 따라 역사 과목은 한 학기 만에 모든 내용을 배워야 하는 암기과목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수능 사회탐구 선택영역 중 국사를 선택한 학생의 비율이 7%대까지 떨어졌다는 사실은 역사 과목이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과 유리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문화와 상품에 교묘하게 숨어든 욱일승천기는 그저 패션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한 아이돌그룹이 욱일승천기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잊힘’을 두려워하는 것이 괜한 걱정이 아닌 이유다.



 사회 전반에 역사 교육 강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사 과목을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수능시험에서 필수과목으로 지정된다면 당장의 효율성은 올라가겠지만 그 과정에서 청소년들이 정말 역사를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예컨대 『백범일지』의 저자가 김구라는 건 외워서 알아도, 정작 이 책을 읽지는 않는다는 거다. 지금 시급한 것은 어려운 수능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관심을 갖는 일이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역사란 그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깊게 팬 주름 위에도 ‘오늘’의 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뿐인 광복절 아침, 15층 아파트 한 동에서 태극기를 내건 집이 채 다섯 가구가 되지 않았다. 단재 선생의 호통 같은 외침이 유난히 생생히 와 닿는다.



여수빈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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