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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랑과 불교식 윤회 신비로운 음악으로 엮다

중앙선데이 2013.08.09 23:35 335호 8면 지면보기
알록달록한 빛깔과 무늬로 기둥을 치장해 페스티벌 분위기를 한껏 낸 뮌헨 슈타츠오퍼의 외관. 사진 이용숙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ㆍ작은 사진)의 음악을 말할 때 많은 사람이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꼽는다. 작곡가 스스로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의 구조·좌석 배치·음향 시스템 등 외관과 내부의 모든 것을 결정한 공연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축제극장에서 바그너가 초연한 작품은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 중 3편과 4편에 해당하는 ‘지크프리트’(1876) 및 ‘신들의 황혼’(1876), 그리고 최후의 걸작 ‘파르지팔’(1882) 세 편이 전부다. 실제로 바그너의 가장 많은 음악극 작품이 초연된 곳은 뮌헨 궁정국립극장이었다. 뮌헨 궁정극장 음악감독이자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 코지마 리스트의 남편이었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1865년 ‘트리스탄과 이졸데’, 1868년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바이에른 군주 루트비히 2세 앞에서 초연했다. ‘니벨룽겐의 반지’ 중 ‘라인의 황금’은 1869년, ‘발퀴레’는 1870년에 프란츠 뷜너의 지휘로 뮌헨 궁정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개관과 함께 전작(全作) 초연이 이루어지기 전에 ‘반지’ 1, 2편이 이미 뮌헨에서 초연된 것이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88년에는 그의 초기작 ‘요정들’이 같은 무대에 올랐다. 이처럼 바그너 예술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 뮌헨이 작곡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준비한 2013년 오페라페스티벌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 … 뮌헨 국립극장 오페라 축제를 가다

뮌헨 페스티벌의 39파르지팔39 1막. 기사 구르네만츠(연광철)가 백조를 쏘아 떨어뜨린 파르지팔(크리스토퍼 벤트리스)을 꾸짖고 있다.
모차르트-바그너 투톱 오페라페스티벌
뮌헨은 오페라 초창기인 17세기부터 독립적인 오페라극장을 건립하면서 대표적인 오페라 중심지가 됐다. 1755년에는 건축가 프랑수아 퀴비에의 설계로 뮌헨 궁(레지덴츠) 안에 새 오페라극장을 완공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가 1781년 이곳에서 초연돼 큰 성공을 거뒀다.

18세기 말 뮌헨시 인구가 급증하면서 새 극장이 절실해졌다. 파리 오데온 극장의 재현을 원한 바이에른 군주 막스 요제프의 새 극장 건립 계획은 우여곡절 끝에 1818년 카를 폰 피셔의 설계로 빛을 보았다.

10대 시절 바그너의 ‘로엔그린’에 완전히 매혹된 루트비히 2세는 1864년 바이에른 군주로 즉위하자마자 빚더미에 눌려 허덕이던 바그너를 뮌헨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조건 없이 모든 빚을 갚아주고 전용극장까지 지어주며 완벽하게 후원했다.

매년 여름 전 세계 오페라 팬을 유혹하는 뮌헨 오페라페스티벌(Die Muenchner Opernfestspiele)은 두 작곡가와의 이런 인연에 힘입어 1875년 ‘모차르트 오페라 및 바그너 음악극 축제’로 시작됐다. 현재 뮌헨 국립극장(Nationaltheater) 또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Staatsoper·국립오페라)로 불리는 극장은 19세기와 2차대전 중 화재와 폭격으로 파괴되었지만 다시 원래의 설계대로 화려하게 재건축됐다.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은 슈타츠오퍼의 그해 정기공연 시즌(가을~이듬해 봄)이 끝난 뒤 인기작을 모아 재공연하는 형식이다. 6월 말~7월 말 열리는 이 페스티벌에 가면 그해 뮌헨 국립극장 최고의 공연들을 다 볼 수 있다.

39파르지팔39 2막. 마법사 클링조르(예브게니 니키틴)가 쿤드리(페트라 랑)에게 파르지팔을 유혹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39파르지팔39 1막. 성배의 왕 암포르타스(토머스 햄프슨)가 끔찍한 고통을 참으며 성배의식을 거행하려고 한다.
연출가 페터 콘비츠니의 새로운 성배 해석. 성배의 궤를 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아이들이 등장한다.
페터 콘비츠니의 성배와 켄트 나가노의 고별사
7월 31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 올 페스티벌 폐막작은 페터 콘비츠니(Peter Konwitschny)가 연출한 바그너의 ‘파르지팔’이었다. ‘세계 최고의 구르네만츠’로 유럽 언론의 극찬을 받는 베이스 연광철을 비롯해 바이로이트의 ‘단골 파르지팔’인 테너 크리스토퍼 벤트리스, 바그너 전문가수로 명성을 굳힌 메조소프라노 페트라 랑(쿤드리 역),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바리톤 토머스 햄프슨(암포르타스 역) 등 호화 캐스팅에다 7년간 뮌헨 국립극장 음악감독으로 활동한 지휘자 켄트 나가노의 고별공연이기도 해서 일찌감치 매진됐다.

1882년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바그너의 ‘파르지팔’은 뮌헨에서는 프린츠레겐트 극장에서 1914년 초연됐다. 이 음악극은 최후의 만찬 및 십자가 수난을 상징하는 종교적 유물 성배(聖杯)와 성창(聖創), 그리고 그들을 수호하는 성배기사단의 이야기다. 기독교의 성찬 전례와 사랑, 불교의 윤회사상과 자비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신비로운 음악적 모티브로 가득한 감동의 세계를 열어간다.

성배의 왕 암포르타스가 마법사 클링조르(예브게니 니키틴)의 조종을 받는 미녀 쿤드리의 유혹에 넘어가 성창을 클링조르에게 빼앗기고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는 기사 구르네만츠의 설명으로 극은 시작된다. ‘순수한 바보’였던 주인공 파르지팔이 연민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뒤 긴 세월 동안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시켜 몰락해 가는 성배기사단을 마침내 구원한다는 결말.

연기가 음악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살려내는 콘비츠니의 연출 방식은 이번에도 효과를 발휘했다. 유쾌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도 여전했다. 1막 무대 위에는 거대한 하얀 나무가 쓰러져 있는데, 성배의 궤는 바로 그 나무 안에 들어 있다. 쿤드리는 어린이 장난감 같은 목마를 타고 쓰러진 나무 위로 미끄러져 무대 위로 등장하고, 날아가는 백조를 쏘아 맞힌 파르지팔은 인디언 같은 차림새로 타잔처럼 밧줄을 타고 나타난다. 장면이 전환되며 나무가 수직으로 일어서면 지하무대 공간이 위로 올라와 열리고, 성배기사들의 전례는 그곳에서 거행된다.

‘성배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유럽문화사에서 긴 세월 논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파르지팔’ 연출가들은 성배를 단순히 술잔으로 무대에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고심한다. 콘비츠니의 성배는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볼 수 있듯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았다는 일설을 기초로 했다. 성궤가 열리면 흰 옷을 입은 여인과 아이 둘이 행복한 표정으로 걸어 나온다. 성배기사단이라는 ‘선택된 남성들만의 결사’는 결핍을 지닌 집단이며, 여성과 아이들이 함께할 때 조화로운 세계가 완성된다는 연출가의 지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암포르타스와 클링조르가 결코 선과 악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를 대표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두 인물에게 같은 옷을 입히고 같은 분장을 하게 했다. 1막에서 흰색이었던 나무는 3막으로 가면 기운을 잃고 죽어가는 성배기사들처럼 바짝 말라버린 검은 나무로 등장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바그너의 엄숙한 지문대로 ‘하늘에서 비둘기가 내려’오긴 하는데 그게 흰 종이에 연필로 대충 그린 비둘기 그림이어서 연출가의 유머감각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신들의 황혼'의 주인공 지크프리트(스티븐 굴드), 군터(이아인 패터슨), 구트루네(안나 가블러).
201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스테판 헤르하임 연출의 39파르지팔39. 역시 베이스 연광철이 구르네만츠 역을 맡았다. 사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유럽 관객 극찬 받은 ‘최고의 구르네만츠’ 연광철
휴식시간을 빼고도 장장 네 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관객을 결코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던 콘비츠니의 ‘파르지팔’은 현대적이고 도발적이면서 친절하고 관객친화적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구르네만츠 역에 완벽함과 깊이를 더해가는 베이스 연광철은 “마치 마술을 걸 듯 관객을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시켰고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텍스트를 완벽하게 전달했다”(‘뮌헨 아벤트차이퉁’ 8월 1일자)는 평을 받았다. 덕분에 타이틀 롤의 벤트리스나 암포르타스 역의 햄프슨보다 훨씬 압도적이고 격정적인 갈채와 환호를 이끌어냈다.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에게 음악감독 자리를 넘기는 켄트 나가노 역시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성악가들을 거의 배려하지 않고 무조건 악보에 충실하려 했던 나가노로 인해 ‘파르지팔’ 음악의 유려하고 감성적인 아름다움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관객들은 떠나는 나가노와 열연을 펼친 출연진에게 20분에 달하는 열렬한 커튼콜로 보답했다.

공연 직후 만난 연광철에게 바이로이트 극장과는 음향 차가 크게 느껴지는 뮌헨 국립극장의 음향 환경에 관해 물었다. “물론 차이가 큽니다. 바이로이트에서는 독특하게 설계된 극장의 음향 효과 덕분에 노랫소리가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들리죠. 하지만 뮌헨극장에서는 소리가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그런 뒷받침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뮌헨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올리비에 피의 새로운 연출작 39일 트로바토레39. 남녀 주인공 만리코(요나스 카우프만)와 레오노라(아냐 하르테로스). 올해 뮌헨 페스티벌에서는 과거 콘비츠니 연출작을 다수 재공연했다. 도발적인 연출로 유명한 39트리스탄과 이졸데39.
실망스러웠던 요나스 카우프만의 ‘베르디’
올해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은 바그너와 동시에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베르디를 기념해 ‘일 트로바토레’를 개막작이자 올리비에 피(Olivier Py)의 신 연출작으로 선보였다. 뮌헨 국립오페라의 로엔그린 역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그너 테너로 꼽히는 요나스 카우프만은 이번 페스티벌에서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와 ‘돈 카를로’의 타이틀 롤을 맡아 베르디 주역으로서의 위상 또한 새롭게 다졌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지크문트(‘발퀴레’ 주인공)이자 파르지팔 역으로 ‘바그너 해의 영웅’이 된 카우프만은 이제 거의 모든 19세기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세계 유수 오페라하우스의 캐스팅 1순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 의도적으로 스타를 만들어내고 지나치게 스타에게만 의존하는 현재 오페라계의 총체적 흐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로 이번 공연에서 카우프만은 대표 아리아를 반음 낮춰 불렀고 섬세한 칸타빌레 부분을 치밀하게 살려내지 못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프랑스의 스타 연출가 피는 피에르 앙드레 바이츠의 무대 디자인을 통해 베르디가 의도했던 ‘키아로스쿠로(빛과 어둠의 대비)’를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호언했다. 원래 극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집시 아주체나의 화형당한 어머니를 나신으로 무대에 세웠다. 물 부족으로 말라죽어가는 자연과 컨테이너 생활자들의 빈곤한 삶을 배경 삼아 전 지구적 환경 문제와 빈부 격차 문제를 부각했다.

그러나 관객의 관심은 피의 연출보다는 가수들이었다. 카우프만은 물론 뮌헨·빈·런던 등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레오노라 역의 소프라노 아냐 하르테로스 역시 내면에 억제된 슬픔과 강인함을 절절하게 표현한 아리아 ‘사랑의 장밋빛 날개’로 관객을 열광시켰다. 페란도 역의 연광철은 “대단히 어려운 아리아를 놀랍도록 유연하고 탄력 있게 불러냈다”는 찬사를 받아 역시 현역 세계 최고의 베이스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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