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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불륜 없이도 시청률 승승장구 어촌 마을까지 살리다

중앙선데이 2013.08.09 23:47 335호 16면 지면보기
NHK 방송 화면 캡처
톱스타 기무라 다쿠야나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나오는 황금시간대 미니시리즈가 아니다. 2013년 최고의 일본 드라마는 국영방송 NHK의 15분짜리 아침드라마다. 지난 4월 시작한 아이돌 해녀 이야기 ‘아마짱’. 매회 20% 시청률을 유지하며 아침 드라마로서는 유례없는 시청률 1위, 주제가 음원 차트 1위 등 이례적인 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주인공이 놀랄 때 외치는 사투리 ‘제제제!’는 올해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컬처# : 일드 ‘아마짱’이 부러운 이유

아침 드라마라면 우리에겐 막장드라마의 다른 이름이지만 NHK의 아침드라마는 주로 고도성장기를 배경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아마짱’은 ‘그때 그 시절의 순수했던 사랑과 추억, 야망과 성공’ 같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1980년대와 2010년대를 오가며 전 연령층이 공감하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다. 동시에 동일본대지진, 고령화 사회, 지역경제 침체, 단절 위기의 전통 경제 등 일본 사회의 현안을 한 방에 해결할 희망을 제시하는 기발한 청사진이다. 드라마 제목을 따 ‘아마노믹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니 그야말로 일본판 ‘창조경제’다.

무대는 동일본대지진의 최대 피해지역 이와테현. 지금도 4만 명 가까이 가설주택 신세를 지고 있는 곳이다. 도쿄의 여고생이 엄마의 고향 어촌에서 할머니의 대를 잇는 해녀가 되고 지역의 스타로 떠올라 침체된 마을을 일으킨 뒤 전국구 아이돌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아이돌을 꿈꾸며 도쿄를 향했던 엄마의 과거와 시골에서 꿈을 대신 이룬 딸의 현재를 오버랩시키는 편집으로 호황의 절정이자 ‘지방의 시대’라고 할 만큼 지역경제가 부흥했던 80년대의 활력을 침체된 오늘에 불어넣고 있다.

시골 마을의 향수와 힐링에 진취적 희망을 솜씨 좋게 엮은 드라마의 인기에 이와테현은 관광특구로 거듭났다. 드라마 장면들은 고스란히 관광상품으로 개발됐다. 해녀들이 갓 잡은 성게를 바닷가에서 맛본 뒤 드라마 속 ‘기타산리쿠 철도’의 모델인 산리쿠 철도에 탑승해 해녀가 직접 파는 성게덮밥을 사먹는 ‘아마짱 투어’가 등장하자 드라마 배경인 어촌마을 구지시는 관광객이 배로 뛰었다. 대지진 이후 환경성이 조성 중인 동북해변 장거리 보행도로에 포함된 구지시 해변길은 올 가을 먼저 개통돼 촬영지를 순례하며 향토요리를 맛보는 코스로 운영될 예정이다.

‘해녀 대물림’ 소재로 시청률 1위 차지
드라마를 통한 경제부흥도 놀랍지만 나는 이를 가능케 한 ‘일드’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싶다. ‘아마짱’을 보다 보면 요즘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시청률의 제왕’이 떠오른다. 시청률을 위해 출생의 비밀, 불륜, 불치병, 아이돌까지 온갖 자극적인 코드를 들이대다 급기야 억지 PPL로 대미를 장식하는 이 코너가 씁쓸한 것은 우리 드라마의 빈곤한 상상력과 소재의 한계를 낱낱이 고백하는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시골마을의 해녀 대물림’이라는 매우 지루할 법한 소재를 시청률 1위 드라마로 빚어낸 건 일본의 대표적인 스토리텔러 구도 간쿠로다. 톡톡 튀는 대사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가 겸 감독이다. 주로 찌질한 하층민들이 평범한 생활 속에 시공을 뛰어넘어 엉뚱한 사건을 겪는 황당한 전개를 선보이지만, 하나하나 ‘살아 있는’ 캐릭터들로 무심한 듯 찡하게 삶의 즐거움을 그려내는 휴먼드라마가 장기다.

야쿠자가 전통예능 ‘라쿠고’에 입문하는 이야기로 때아닌 라쿠고 붐을 일으켰던 ‘타이거 앤 드래곤’, 시한부 청년에게 더없이 유쾌한 마무리를 선사한 ‘기사라즈캐츠아이’, 작은 커피숍에 모인 인간군상의 종횡무진 엇갈린 사랑의 화살표가 전혀 막장스럽지 않았던 ‘맨해튼 러브스토리’, 어둡고 음침한 추리소설을 톡톡 튀는 판타지로 버무린 ‘유성의 인연’까지, 개성 넘치는 스타일로 어떤 장르로도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를 빚어 왔다.

한국 드라마엔 과연 이런 개성과 다양성이 있을까. 우리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은 장르별로 형성되는 유행의 흐름 속에 거의 엇비슷하다. 막장·불륜이 아니면 진행되지 않는 아침드라마, 재벌2세와 신데렐라가 적당히 밀당하는 로맨틱코미디, 이분법적 선악구도가 극명한 법정드라마, 가족 3대의 화합을 그리는 주말 가족드라마, 시공을 넘나드는 판타지 팩션 사극… 몇 마디 키워드로 간단히 정리되는 우리 드라마 지형도에 다양성은 없다. ‘시청률의 제왕’의 반복되는 뻔한 패턴이 당당한 이유다.

최근 부쩍 일드 리메이크가 활발해진 건 우리 시청자도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는 방증일 터. 지난주 종영한 ‘여왕의 교실’, 상반기 화제작 ‘직장의 신’, 9월 방송예정인 ‘수상한 가정부’ 등은 모두 기존의 틀을 넘어 다양한 각도로 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들이다. 기왕 다양성을 일드에서 찾는다면 아예 ‘아마짱’을 리메이크하는 건 어떨까. 창조경제의 해답까지 덤으로 굴러올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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