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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파워샷 … 쳤다 하면 300m 기본으로 넘겨

중앙선데이 2013.08.11 00:21 335호 19면 지면보기
프로 6년차 김태훈(28)이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신설 대회인 보성CC클래식(총상금 3억원)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김태훈은 4일 전남 보성군 보성골프장(파72·7045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라운드에서 5타를 줄여 최종합계 21언더파 267타로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은 1번 홀에서 드라이버 티샷을 하고 있는 김태훈. [뉴시스]
92타. 1997년 메이저 대회인 디 오픈 챔피언십이 열린 스코틀랜드의 로열 트룬 골프링크스. 당시 37세의 이언 베이커 핀치(53·호주)는 첫날 경기를 마치고 절망했다. 1991년 대회 우승자였지만 핀치는 1라운드 뒤 기권했고 골프 무대에서도 은퇴를 선언했다. 1m93㎝의 거구인 그는 “나는 그날 오후 라커룸에서 엉엉 울었다”고 고백했다.

8년 만에 드라이브샷 입스(Yips) 극복하고 부활한 김태훈

 메이저 대회 1승을 포함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등에서 통산 18승을 거둔 이 사나이를 굴복시킨 것은 무엇일까. 그날 핀치는 버디 없이 보기 6개와 더블보기 6개, 트리플보기 1개를 기록해 무려 21오버파를 쳤다. 파71의 스코어카드에 적힌 타수는 그렇게 92타가 됐다.

 흔히 골프 입스(Yips)를 설명할 때 가장 대표적인 선수로 꼽히는 이가 바로 핀치다. 입스란 결과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정상적인 스윙을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특히 프로골퍼들에게 입스는 핀치처럼 선수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병이다. 근육이 경직되면서 급격한 동작이 나온다. 원래 입스는 퍼팅과 관련된 용어다. 짧은 퍼팅을 앞에 두면 손이 덜덜 떨리고 스트로크를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강하게 쳐 홀을 크게 지나치는 상황을 일컫는다. 이를 빗대어 ‘드라이브샷 입스’ ‘어프로치샷 입스’라고도 한다.

 90년대 후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데이비드 듀발(42·미국)도 마찬가지다. 체중 감량 이후 드라이브샷 입스 증상이 나타나면서 PGA 투어 무대에서 이름을 감췄다.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귓속 달팽이관의 이상까지 겹치면서 그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같은 ‘악몽’을 떨쳐낸 선수도 있다. 국내 선수 중에서는 김대섭(32·우리투자증권)과 최진호(29·현대하이스코), 장하나(21·KT)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세 선수는 퍼팅 입스가 아닌 드라이브샷 입스로 갖은 고생을 했다.

 “티 위의 공이 2개로 보였다”는 김대섭은 드라이브샷 입스를 치유하는 데 2년의 시간이 걸렸다. 라운드마다 5개 이상의 티샷 OB가 났던 최진호도 2010년 8월 레이크힐스오픈에서 통산 2승을 할 때까지 3년 가까운 시간을 절망 속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무려 300야드의 장타를 날렸던 장하나 역시 데뷔 첫해인 2011년 한화금융 네트워크클래식 마지막 날 7개의 OB를 내며 1년 넘게 슬럼프를 겪었다.

 그래도 이 세 선수의 고통은 짧았다. 무려 8년 만에 드라이브샷 입스를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한 선수가 있다. 지난 4일 한국프로골프(KLPGA) 코리안 투어 보성CC 클래식 J골프 시리즈에서 정규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한 김태훈(28)의 얘기다(※그는 11일 전남 해남의 파인비치 골프장에서 끝나는 솔라시도-파인비치 오픈에서 시즌 2승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2003년 국가상비군에 이어 2004년 김경태(27·신한금융그룹)와 함께 태극마크를 달았다. 초등학교 때 아이스하키를 한 덕에 파워풀한 드라이브샷이 일품이었다. 그러나 2004년부터 끝 모를 난조가 찾아왔다. 드라이브샷 입스였다. 90타를 치기 일쑤였다. 2007년 KPGA 코리안 투어에 데뷔했지만 김경태가 그해 신인상과 상금왕,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 때 11개 대회에 출전해 모조리 컷 탈락했다.

 “한 대회에서는 11개 홀에서 OB를 12개나 냈다. 아마도 기권하지 않고 끝까지 쳤다면 120타를 넘게 쳤을 거다. 동반 선수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기권했다. 지금 생각해도 지옥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골프를 시작한 김태훈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성적이 좋았다. 그는 “고 2~3학년 때 7승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목표로 했던 국가대표가 됐다. 그렇게 원하던 태극마크를 달고 나니까 목표의식이 사라지면서 슬럼프가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4년에는 그게 드라이브샷 입스인지를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게으름을 피웠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샷 연습에 매달렸다. 드라이브샷 연습만 하루에 700~800개를 쳤다. 1년에 드라이버를 무려 다섯 개씩 깨먹을 정도로 연습했지만 그럴수록 샷은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전북 익산이 집인 김태훈이 ‘입스’란 개념을 알게 된 것은 2004년 성균관대에 입학한 뒤 1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아버지 김형돈(52)씨는 “지방에서 어렵게 골프를 하다 보니 정보가 부족했다”며 “그때부터 입스를 치유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실타래가 엉켜버렸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5년에 세미프로에 합격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2006년 2부 투어에서 한 차례 우승할 수 있었고 그해 상금랭킹 상위 자격으로 2007년 정회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듬해 시드를 잃었고 2008년 군에 입대(척추측만증으로 공익근무요원)하면서 이름(범식)을 개명하기까지 했다. 아버지 김씨는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들의 이름을 개명했다. 전북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선수였는데 성적이 꼴찌를 맴돌아서 경기가 끝나면 씻지도 못하고 집으로 도망치듯 오곤 했다”고 말했다. 2009년 말 휴가를 내고 응시한 2010년 Q스쿨에서 다시 시드를 따냈지만 2011년 또 Q스쿨을 가야 했고 아예 2012년에는 이마저도 탈락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때 아버지 김씨는 아들에게 처음으로 “이제 그만 포기하자. 입스에 매달리지 말자”라고 얘기를 했다.

 체념.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이었다. 그런데 아들 김태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병원으로 치면 전국의 용하다는 명의와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유명한 골프 교습가도 멘털 전문가도 한둘이 아니다. 멘털 요가를 위해 절에도 찾아가 두세 달씩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결국 해답은 김태훈 스스로 찾았다. 아니, 두 사람의 조력자가 있었다. 그 첫째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꽃 얘기를 했다. “봄에 피는 꽃이 있고 여름에, 가을에, 겨울에 피는 꽃이 따로 있다. 너는 아직 꽃을 피울 때가 되지 않은 것 같다. 더 기다리고 노력해 보자.” 아버지 김씨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윽박지르지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불어넣었다. 그러다 한 귀인을 만났다. 몸의 밸런스가 깨져 있기 때문에 드라이브샷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바로 척추측만증이 문제였다. 왼쪽 어깨는 올라가고 오른쪽 등 뒤가 튀어나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의 변화가 김태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또 더 넓은 페어웨이의 코스로 가서 샷을 함으로써 OB가 나지 않는다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는 그렇게 돌아왔다. 무엇보다 김태훈은 보성CC 클래식에서 371야드의 15번 홀(파4)에서 3, 4라운드 두 차례나 원 온에 성공하는 파워 드라이브샷으로 입스를 극복했음을 증명했다. 드라이브샷을 쳤다면 기본으로 300m(330야드)를 날리는 그는 “내 골프의 꽃은 이제 피었다”고 활짝 웃었다.

 남자골프계는 하반기 무대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며 그를 크게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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