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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청자, 宋 아닌 거란 공예기술 힘입어 탄생

중앙선데이 2013.08.11 01:18 335호 26면 지면보기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근래에 만드는 솜씨와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참외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고 그 위에 연꽃에 엎드린 오리 모양이 있다.”(『고려도경』(1123년) 권32 도존(陶尊)편)

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① 청자

12세기 전반 고려를 찾았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묘사한 고려청자의 모습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술병 형상의 고려청자 모습이 쉽게 연상될 만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청자의 종주국인 중국인의 눈에도 중국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 제품으로 비칠 만큼 고려의 청자 제조술이 발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서긍이 주목한 고려 독자의 제품은 비색 청자였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인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당당한 어깨와 유연한 곡선미가 특징이다. [사진 간송미술관]
“건주(建州)의 차, 촉(蜀)의 비단, 정요(定窯)의 백자, 절강(浙江)의 차 등과 함께 고려비색(高麗翡色*비색청자)은 모두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수중금(袖中錦)』)

비색청자는 서긍뿐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한, 고려의 높은 기술 수준이 반영된 제품이었다. 청자는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제작된다. 이 정도의 온도를 낼 수 있는 가마 시설에다 흙과 유약이 고온에서 융합돼 비취색이 감도는 특유의 색깔을 창출하는 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비색청자는 지금의 신소재 첨단제품이나 다름없었다. 서양에선 17세기에야 제작이 가능했다. 중국은 이미 9세기 무렵 청자를 생산했는데, 고려는 10세기 초 중국에서 기술을 수입해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1세기 후반~12세기 초에 독자의 제작기술을 개발해 탄생한 게 비색 청자다.

서긍은 “(고려의) 그릇은 대부분 금으로 도금한 것을 썼고 혹은 은으로 된 것도 있으나 청도기(靑陶器)를 귀하게 여겼다”고 했다.(『고려도경』 권26 연례(燕禮)조)

12세기 초만 해도 고려 궁중의 연회에서 청자가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보다 또 한 단계 도약된 기술로 제작된 것이 상감(象嵌)청자다. 12세기 중반부터 만들어졌는데, 이때부터 각종 형식의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다. 서긍이 상감청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12세기 전반까지 상감청자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정자 지붕까지 뒤덮은 청자
상감청자는 상감 기법으로 만들어진 청자다. 상감은 원하는 형태로 물건을 만든 뒤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흰색과 붉은 색 흙을 발라 굽는 기법이다. 단조로운 푸른색 대신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져, 화려하고 장식적인 멋이 두드러진 고려청자의 백미다. 중국 기술을 모방하고 그 영향을 받아 생산된 ‘고려초기 청자’와 달리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생산된 청자를 ‘고려중기(11세기 후반~13세기 중반) 청자’라 한다(장남원, 『고려중기 청자 연구』, 2006).

1 송 황실의 제기(제사 용기)로 사용된 청자 파편. 2 중국 닝보(寧波)에서 발굴된 청자 파편. 박종기
“(고려 18대 국왕 의종은) 민가 50여 구(區)를 헐어서 대평정(大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해 현판을 짓게 했다. 주위에 이름난 꽃과 특이한 과실수를 심은 뒤 진기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좌우에 진열했다.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다. 그 북쪽엔 양이정(養怡亭)을 지어 청자로 지붕을 이고, 남쪽엔 양화정(養和亭)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이었다.”(『고려사』 권18 의종 11년(1157) 4월)

12세기 중엽 고려왕실이 지은 정자의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기록이다. 정자인 ‘양이정’의 지붕을 인 청자기와는 현재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 무렵 본격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는 항아리·주전자· 대접·접시·잔·병 등의 식생활 용구, 촛대·향로 등의 제의(祭儀) 용구, 베개·상자·의자·벽돌·기와 등의 주거 용구, 연적·벼루·붓꽂이 등의 문방 용구에 이르기까지 의식주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청자가 대량 생산돼 소비된 건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상감청자가 제작된 12세기 중반 이후다. 하지만 고려청자가 실제로 어떻게 생산·유통·소비됐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중국인 서긍이 비색 청자에 관한 기록을 남겼지만, 최고의 기술수준을 보여준 상감청자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더 크다.

그런데 지난 6월 26~30일 중국 항저우 저장대학에서 개최된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한국고등교육재단 지원)는 그런 아쉬움을 풀어준 기회였다. 한국·중국·일본의 고려청자 전공 학자들이 함께 모인 첫 학술회의인데, 제출된 논문만 무려 40여 편이나 됐다. 고려청자가 학술적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회의였다. 세계적으로 고려사 일반을 전공하는 외국인 학자는 10명이 채 안 되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학술회의의 규모와 수준은 필자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을 안겨주었다.

이번 자리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상감청자였다. 그 제작 기술과 유통이 주된 의제였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일본 학자 대부분은 상감청자 제작 기술이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봤다. 초기 청자 제작 기술은 중국에서 수용된 게 맞다. 하지만 상감청자 제작 기술까지 그렇게 본 것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독자적인 기술은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수용(모방)되고 변용(응용)과 창조의 단계를 거쳐야만 독자의 기술로 발전한다. 기술이 지닌 국제적 속성이다. 고려왕조 시절 국제 질서는 고려와 송나라·거란·금나라(여진)·일본 등이 다양하게 교류한 다원적인 사회였다. 고려는 송나라 외에 여러 국가의 교류했던 것이다. 더욱이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21년부터 50년간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한다. 민간교류는 계속됐지만 국교 단절은 아무래도 새로운 기술의 수용과 교류에 제한을 주기 마련이다. 송과의 국교 단절 이후 고려의 공예기술은 거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1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고려도경』 권19 ‘民庶 工技’ 조)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도자기 등 그릇 제조 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상감 기술은 금속 제품과 나전칠기를 만들 때 금이나 은을 잘게 실 모양으로 꼬아 문양 주변에 테두리로 두르고, 그 속에 조개껍질 등을 박아 넣는 기술인 ‘입사(入絲)’에서 유래된 것이다. 입사는 거란의 전통적인 공예기법이다. 이처럼 상감기술은 고려가 처한 국제질서 속에서 거란의 기술과 관계를 맺고 있다. 송나라로부터 상감 기술이 일방적으로 수용됐다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청자 종주국이 고려청자 역수입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은 상감청자의 유통 문제였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수도를 항저우로 옮기면서 남송시대(1127~1279)가 시작된다. 상감청자는 남송시대인 12세기 중반 이후 제작되는데, 남송 이후 송과의 교류는 고려사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학계는 두 나라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를 중심으로 상감청자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고려청자가 발굴된 사실이 이번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의 완제품이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티베트 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선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생산된 청자가 나라 전역에서 발굴됐고, 상감청자를 포함한 많은 고려청자가 멀리 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도 발굴됐다는 사실도 보고됐다. 어떤 중국인 학자는 “중국은 남송 때 고려의 상감청자를 역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의에 때맞춰 항저우에 있는 ‘중국 관요(官窯) 박물관’에서 고려청자 특별전이 열렸다. 남송 때 항저우 인근에서 발굴된 고려 상감청자편(*파편)이 대량으로 전시됐다. 특히 상감청자로 제작된 황실의 제의(祭儀)용 물품과 황제의 비(부인) 및 궁전의 명칭이 표면에 새겨진 상감청자편도 있었다. 상감청자가 송나라 황실에서 수입돼 사용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중반부터 제작된 상감청자가 남송은 물론 동아시아 일대에까지 대량으로 유통·소비된 사실은 기록상 나타나지 않은 고려의 활발했던 대외교류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의 명품 청자는 『고려사』 『고려도경』 등 몇 편에 불과한 빈약한 문헌기록의 공백을 메워주고 고려의 가려진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한 고려 문화의 아이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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