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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방광암 걸린 저우언라이 ‘대타’로 복귀

중앙선데이 2013.08.11 01:48 335호 29면 지면보기
미국의 무인정찰기를 격추한 공군 부대원들을 격려하는 저우언라이(오른쪽 둘째)와 예젠잉(오른쪽 첫째). 1965년 1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1971년 9월 13일, 중국의 2인자 린뱌오(林彪·임표)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한직에 있던 원수 예젠잉(葉劍英)이 국방부장 직을 승계했다. 72년 5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몸에서 암세포가 발견됐다. 당시 중국은 장칭(江靑·강청)과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 왕훙원(王洪文·왕홍문), 야오원위안((姚文元·요문원) 등 4인방의 천하였다. 이들은 보안을 이유로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외부로 새나가지 못하게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4>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발병 사실을 몰랐다. 온갖 일을 다 시켜먹었다. 저우언라이의 주치의들은 마음이 급했다. 몰래 예젠잉을 찾아가 이실직고했다.

린뱌오 사후 마오쩌둥은 간부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예젠잉은 마오쩌둥과 함께 외빈 접견이 끝나자 저우언라이의 혈뇨(血尿)가 담긴 병을 내밀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치료 전담반을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예전잉에게 책임을 맡겼다. 저우언라이를 대신할 인물도 물색했다. 시골에 쫓겨가 있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을 극비리에 불러 올렸다.

시아누크 환영만찬회가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이 좌정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만찬장 문이 열리며 꾀죄죄한 몰골의 노인이 나타났다.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 앉아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는 노인을 마오쩌둥의 여비서가 와서 안내하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주석이 덩샤오핑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외신기자들이 용수철처럼 밖으로 튀어나갔다.

전 세계의 신문들이 덩샤오핑의 기용 가능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일단 소문부터 내놓고 여론을 들어보는, 중공의 전통적인 방법을 외국인들은 알 턱이 없었다. 만찬장에서 돌아온 예젠잉은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팬티 바람으로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덩샤오핑이 돌아왔습니다. 군사위원회를 이끌 수 있도록 주석께 간청합니다.”

마오쩌둥은 예젠잉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저우언라이와 상의했다. 덩샤오핑의 부총리 복직과 총참모장 임명을 결정했다.

73년 3월 9일, 저우언라이는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자신의 증세를 설명했다. “2주간 휴가를 청한다. 주석도 동의했다. 내가 없는 동안 정치국 회의는 예젠잉이 주재한다. 군사위원회 업무도 마찬가지다.” 다음날, 중공 중앙은 덩샤오핑의 부총리 임명을 발표했다. 5개월 후, 덩샤오핑은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중앙 정치국과 군사위원회 진입은 시간문제였다.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은 한숨을 돌렸다. 4인방은 긴장했다.

해가 바뀌자 저우언라이는 해방군 총의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예젠잉은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방광암에 효과를 봤다는 비방(秘方)과 험방(驗方)을 다 긁어 모았다. 수술 받는 날은 수술실 앞을 떠나지 않았다. 결과를 꼬치꼬치 캐묻고 나서야 병원문을 나섰다. 비서의 기록에 의하면 “온갖 전쟁을 다 해봤지만 암세포와의 싸움처럼 힘든 것도 없다”며 한숨 내쉴 때가 많았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도 예젠잉이 병원을 방문할 때는 문 앞에 나가 맞이했다.

예젠잉과 저우언라이는 1924년 8월, 광저우(廣州)의 황포군관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교장 장제스는 교수부 부주임 예젠잉을 총애했다. 무기를 휴대하고 교장 집무실을 마음대로 출입할 정도였다. 프랑스 유학을 마친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했다. 두 청년은 국·공 합작 시절인 탓도 있었지만 항상 붙어 다녔다. 나이는 예젠잉이 27세, 저우언라이보다 한 살 더 많았다.

3년 후, 국·공 합작을 파기한 장제스가 공산당원을 숙청했다. 예젠잉은 “사람을 많이 죽인 정당은 성공할 수 없다”며 국민당을 떠났다.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입당을 자청했다. “피에는 공짜가 없다. 많이 흘린 정당이 집권한다.” 이제 공산당은 틀렸다며, 열성 당원들조차 당을 떠날 때였다. 50년 가까이 두 사람은 상부상조했다.

덩샤오핑이 저우언라이를 대신해 국무원과 군사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관장하자 4인방은 반발했다. 정치국 회의에서 사사건건 덩샤오핑을 물고 늘어졌다.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당 부주석 왕훙원은 악담까지 퍼부어댔다. 덩샤오핑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면, 예젠잉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4인방을 공격했다. 뾰로통해서 앉아 있던 장칭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도 개의치 않았다.

4인방은 전국적으로 덩샤오핑 비판운동을 전개했다. 마오쩌둥도 예전 같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다 말았다 했다. 예젠잉과 덩샤오핑은 실각 위기에 몰렸다.

예젠잉은 저우언라이의 치료와 덩샤오핑 보호에 매달렸다. 훗날 경호원 중 한 사람이 “밤마다 방안에서 혼자 흐느끼곤 했다. 통곡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는 구술을 남겼다. 병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죽든지 살든지 결과도 명쾌하다. 저우언라이의 병세는 호전될 기색이 없었다.

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4인방은 추모 열기에 찬물을 뿌렸다. 빈소 설치를 불허하고 상장(喪章) 착용을 금지시켰다. 검은색 옷도 못 입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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