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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왜 지금 인문학인가 ?

중앙일보 2013.08.09 00:33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와 인문에 애정을 표시한 것은 인문학 하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하고 있음을 보는 듯하여 뿌듯했다. 그러면서도 지도자로부터 경제와 정치 이야기만을 듣는 것에 익숙하였기에, 그 현실성에 대한 확신은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휴가 후 첫 일정으로 그제 인문학자들을 만나 인문학적 가치가 부각되는 국내적·국제적 맥락을 인문학자들과 공감하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안도했다.



왜 지금 인문학인가? 왜 지금 우리는 인문적 가치에 주목하는가? 오늘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인문학이 부각되는 데에는 국내적·국제적 이유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사회적 불안감에서 출발한다. 경제강국을 향한 질주는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문화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지갑은 조금 두꺼워졌지만 삶은 고단하고 허탈하며 환경은 불안해졌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경쟁과 투쟁의 땅에서 온기를 찾는 갈망이 배어난 것이다.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현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풍토를 넘어서 대화·상생·돌봄의 따뜻함을 향한 시선, 타협과 합리성을 통한 예측 가능한 사회를 향한 시선이 요구되고 있다. 인문학이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어문학·역사·철학뿐 아니라, 인간에 관심을 갖는 인류학·심리학 등의 사회과학과 인지과학·예술까지도 아우르면서 나아가야 한다.



 국제적 맥락에서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실용적인 이유에서 출발한다. 세계는 지식기반 경제에서 창조경제로 이행하고 있다.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위한 과학기술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 조그만 반도체 내에 얼마만큼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가가 산업적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창조경제는 인간친화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과학기술과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요체임을 강조한다. 이런 창조경제의 개념은 이미 선진국에서 오래전부터 이야기돼온 것으로 전혀 새로울 게 없으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창조경제의 핵심과 연결된다. 기존의 사고방식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시각을 탐색하는 것은 인문학의 본성이며 인간의 감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인간친화적인 아이디어를 구성하는 것은 인문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행복과 활력을 증진하고 창조경제를 통하여 산업을 견인하는 것이 큰 과제다. 그러나 인문학의 숙제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폐쇄성을 넘어 다문화 사회의 개방의 윤리를 준비하여야 하고, 인접 강대국인 중국과 문화적 유대를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 다가오는 문화패권주의에 대비하여야 한다. 인문학이 이런 다양한 시대적 소명을 읽지 못하고 단지 상한 영혼에 도피처를 주는 것에 만족한다든지 인기에 영합해 잇속이나 채우고자 한다면 영영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인문학이 시대적 요청에 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몫이다. 지금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의 2% 남짓만이 인문사회 영역에 배당되고 인문학 박사가 안정된 직장을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인문학 관련 국가위원회 하나 없이 교육부의 한 부서가 인문정책을 담당하는 상황에서 인문학은 필요한 인력을 확보할 수 없다. 시대적 요청을 읽어내어 인문학 활성화의 문을 연 박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숙제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갈지 기대된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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