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가쟁명:유주열] 영락제와 쇼군 이에야스

중앙일보 2013.08.05 17:39
베세토(BESETO)의 경험



한때 베세토라는 말이 유행했다. 베이징-서울-도쿄의 앞 글자를 딴 조어이다. 한국 사람으로 베이징과 도쿄에 3년 이상 살면서 베세토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외교부 근무 시 두 번째 공관이 도쿄 대사관이었다.



중국말로는 둥징(東京) 우리말로는 동경이라고 부르는 이 도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시아를 제패한 제국 일본의 수도(帝都)였다. 아시아의 지식 청년들에게는 도쿄가 서구 문명이 뭔지 알 수 있게 한다는 꿈의 도시였다. 특히 일본이 청(淸)국과의 전쟁(甲午戰爭)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을 배우기 위해 멀리 갈 것 없이 인근의 동양(日本의 별칭)에서 배우는 것이 낫다고 하여 한 때 도쿄의 중국 유학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중국과 한국의 근대화 중심에는 도쿄 유학생이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도쿄 유학생들이 제일 먼저 독립 선언문을 내는 등 그들은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게 하려는 민족의 선구자들이었다. 도쿄의 중국의 유학생들 사이에 한 때 반청(反淸)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여 주일(駐日) 청국공사관을 긴장시켰다.



이러한 유서 깊은 도쿄에 근무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도쿄에 살아야 일본을 좀 더 잘 이해할 것 같았다. 일본어 구사가 부족한 대사관 직원들은 일본어를 배워 가면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주말에는 일본어 선생과 함께 도쿄 시내며 인근의 역사 유적지 등을 탐방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일본어 여선생님은 우리가 탐방할 장소의 역사적 사실 등을 요약하여 준비해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를 좀 더 잘 아는 친구 분과 같이 나오기도 한다. 역사를 통한 살아 있는 일본어 학습이었다.



에도(江戶)가 키워 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도쿄는 본래 에도(江戶)로 불리어진 이름 없는 어촌으로 스미다가와(隅田川)라는 강과 바다(東京灣)가 만나는 곳이었다. 습지가 너무 많고 강물과 바닷물이 조수에 따라 섞여 있어 농사는 생각할 수 도 없었다. 이렇게 버려진 지역에 뜻밖의 인물이 전봉(轉封)되어 오면서 에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16세기 일본의 전국(戰國)시대를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오만함과 방심으로 심복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뜻밖에 목숨을 잃는다(本能寺의 變). 오다에게 갑작스러운 변고가 일어났을 때 오다의 실력 있는 부하들은 오히려 미쓰히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의협심이 강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에 豊臣秀吉)는 멀리 히로시마 근처에서 전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깜짝 휴전을 하고 몰래 군사를 돌렸다. 미쓰히데를 징벌하러 교토로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미쓰히데는 교토 입구의 야마자키(山崎)에서 기다렸다. 정의가 살아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일전(一戰)이었다. 많은 다이묘(大名 영주)들은 인근 산위에서 관측소를 만들어 놓고 승부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긴 편에 줄을 서 보겠다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인가. 주군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는 의리를 내 세운 히데요시 군대는 장시간 행군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미쓰히데는 패주하여 산에서 길을 잃고 산적에게 살해된다. 1582년 7월2일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의 일이었다.



이 한 번의 전쟁으로 오다의 일개 장수에 불과했던 히데요시는 목숨을 걸고 주군에 충성을 다했다는 의리의 부하로 오다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히데요시에 대항할 명분과 힘을 잃었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는 히데요시에게 열등의식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 있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히데요시는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넘어 다 볼 인물로 이에야스를 경계하였다.



이에야스는 성장 환경이 천민 출신의 히데요시와는 달랐다. 이에야스는 나고야 인근 비옥한 오카자키(岡崎)를 소유하는 다이묘의 아들로 덕망까지 갖추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미리 꺾어야 했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이에야스가 불만을 품고 히데요시에 대항하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비옥한 오카자키 지역을 내 놓고 척박한 에도로 가라는 황당한 전봉 명령을 내렸다.



이에야스의 가신(家臣)들은 히데요시의 함정을 모르고 거칠게 반발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간파하고 있어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가신들을 설득하였다.



첫째는 지금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키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영원히 제거될지도 모른다. 둘째는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하면 공신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턱 없이 부족하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통해 중국을 침략할 허황된 야심을 가지고 있다. 영지를 미끼로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전쟁지원을 명령할 것이다. 차라리 에도에서 모두 농부가 되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을 위로하고 창과 칼을 녹여 삽과 괭이를 만들었다. 이에야스 가신들은 농민이 되어 강을 준설하고 바다를 메워 농지를 만들고 신도시를 건설했다. 일본 최초로 매립을 통해 도시건설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 도쿄의 일왕이 거주하는 왕궁 앞은 모두 바다였다. 지금 히비야(日比谷)공원과 긴자(銀座) 등은 모두 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지역이다. 그리고 에도 성을 쌓으면서 우치보리(內堀) 소토보리(外堀)라는 호성하(護城河)를 만들어 운하로 연결시켜 물류의 흐름을 도왔다. 도쿄에 다리가 많은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이에야스의 예상대로 일본열도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칼날을 조선을 향하였다. 조선을 먼저 정복하고 조선의 군사를 앞세워 중국(明)까지 밀고 갈 작정이었다. 이것은 선교사들로부터 인도와 중국을 알게 된 주군 오다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속전속결로 금방 끝날 것 같은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은 7년의 세월을 끌었다. 조선에서 뜻밖에도 의병(義兵)의 게릴라전, 해전의 천재 이순신의 활약으로 중국은커녕 조선도 쉽지 않았다.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는 기치로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자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이 뜻대로 되지 않자 성질 급한 히데요시가 화병을 얻어 어린 아들을 남겨 놓고 급사한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명분 없는 7년 전쟁(1592-1598)은 이웃 나라 조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끝이 난다.



조선침략 전쟁에 참여한 일본의 수많은 다이묘들은 군인들을 잃고 재정이 고갈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황무지 개간에 공을 들인 이에야스는 멀쩡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가 일본의 정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도 개간을 통한 재정 비축과 거의 손상되지 않은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사후 2년 만인 1600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잔존 세력과 천하의 주인을 정하는 전쟁을 일으킨다. 일본 전국시대를 종언하는 마지막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쟁이었다.



에도와 베이핑(北平)



이에야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에도는 처음으로 일본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만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패배하였다면 에도는 작은 변방 도시로 남게 되고 히데요시가 근거지로 했던 오사카(大阪)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 오늘의 일본의 수도는 오사카였을지 모른다.



세키가하라 전쟁은 장래 일본의 정치 중심을 선정하는 싸움이기도 하였다. 이 보다 200년 전 명(明)의 영락제(永樂帝)가 황실의 역적을 제거한다는 명분(靖難의 變)으로 당시 수도 난징(南京)을 공격하여 조카인 황제를 죽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해 자신의 세력 근거지 베이핑(北平)을 수도로 정한 것과 유사하다. 만일 영락제가 난징 원정에 실패하였다면 베이징은 베이핑이라는 이름 그대로 변방의 요새(garrison)타운으로 전락했는지 모른다. 정난의 변은 장래 중국의 으뜸 도시를 선정하는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에도에서 도쿄로 진화



180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을 개방시키면서 아시아에 대한 서방인의 우월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지리상 발견과 산업혁명으로 늘어난 생산에 대한 소비시장 확보로 해양무역이 활발해지자 미국의 상선(商船)들은 태평양을 건너 중국(홍콩)과 교역을 시작하였다. 그 중간 지점에 석탄과 물 등 보급기지로 일본열도가 놓여 있었다. 미국이 태평양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페리 제독이 이끄는 전함(黑船)을 파견 일본을 개방시키고자 하였다. 처음으로 미국의 전함을 본 일본 조야는 대단한 쇼크를 받는다.



이른 바 “흑선쇼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무사 안일의 에도 정부는 우왕좌왕하면서 곳곳에서 취약성을 들어낸다. 이 절호의 찬스를 이용 과거 히데요시를 따르던 서(西)일본의 다이묘들이 세력을 연대하고 이에야스가 만든 에도 정부에 무력으로 대응한다. 그들은 에도 정부의 위세에 허수아비 노릇을 해온 일왕(天皇)을 내세워 왕정복고의 명분까지 내 세운다. 정확히 268년 만에 제2의 세키가하라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는 에도 정부가 패배하면서 왕정이 복고된다. 이른바 명치유신이다. 승리한 왕당파들은 에도를 버리고 오사카 또는 일왕이 거주해 왔던 인근인 교토(京都)로 정치의 중심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에도 정부의 잔존세력이 필사적으로 저항 언제 다시 에도를 탈환 당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왕당파들은 어린 일왕(明治)을 내전(內戰)의 최전선인 에도로 옮기고 에도를 동쪽의 교토(東京都)로 이름 짓고 배수진을 통해 내전에서 승리한다.



영락제의 베이징 건설



도쿄 대사관 근무 후 베이징 대사관에 전근되어 와서 보니 베이징 역시 중국대륙의 북동쪽에 지우 쳐 있으며 신기하게도 에도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수도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베이징에 처음으로 통일 중국의 수도로 정한 국가는 몽골의 원(元)이다. 그 다음으로 명(明)의 영락제이며 청(淸)태조 누루하치의 손자 순치(順治)가 1911년 신해혁명 시까지 베이징을 수도로 이어 받았다.



영락제는 정난의 변 이후 자신의 세력권인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북방의 추위와 건조로 황량한 베이징의 위상이 높지 않아 따뜻하고 한족의 문화가 꽃을 피우는 난징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했다. 자신이 죽은 후 후손들이 다시 난징으로 돌아 가버릴까 두려워해서인지 천년을 담보할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과 후대 황제의 능(陵)도 수십 년 걸쳐 미리 마련하였다. 지금의 자금성과 명 13릉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황족에게 환심을 사기위해 왕부(王府)를 지어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의 이에야스가 문화의 중심인 교토와 오사카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황량한 에도의 발전을 위해 전국의 다이묘로 하여금 에도에 거대한 저택을 3개 이상 짓게 하고 산킨 코타이(參勤交代)라 하여 다이묘들이 에도와 그들의 영지를 번갈아 살도록 하여 동북으로 지우 친 에도의 교통과 상업이 발달되도록 독려하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영락제가 수십 년에 걸쳐 건설한 베이징에서 처음 받은 인상은 중국의 수도를 넘어서 고대 세계의 수도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거대한 자금성이 버티어 있고 과거 성곽은 헐렸지만 주요 문(門)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황제의 수도로서의 당시의 위용을 추측할 수 있었다. 베이징은 중국이 아니고서는 세계 어디를 가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 만든 경이(wonder)가 모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베이징의 사관구(使館區)



베이징의 외교관이 거주하는 곳은 과거 성곽의 기준으로 볼 때 모두 성(城)의 밖이다. 사신(使臣)은 주변의 조공국에서 파견되는 조공사로 반드시 베이징의 동대문(東大門)인 조양문(朝陽門)을 통과해서 들어와 황제를 알현할 수 있지만 성내에 거주할 수는 없었다. 아편전쟁 이후에 부득이 서양에도 문호를 개방하지만 서양의 사절을 베이징 성내에 거주를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쇠락하는 청조는 서양과의 몇 차례 전쟁에 지고 나서는 열강의 압력으로 성내에 사관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금성의 동편 과거 조공사절이 일시 묵었던 예부(禮部)근처에 사관구(diplomatic area)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베이징 반점(北京飯店) 건너편 정의로(正義路) 주변에 외국의 공사관이 즐비하였다. 1949년 신 중국 건설 후에는 굴욕적인 사관구를 없애고 조양문 밖에 새로운 사관구를 만들었다.



도쿄에는 베이징처럼 사관구가 따로 없다. 중국에 외교공관이 개설 상주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아편전쟁후인 1860년대 이후 주로 절간(寺刹)을 빌려 공관을 개설했다. 명치유신 이후 주요 열강은 대사관을 왕궁근처에 신축하였으나 본격적인 대사관이 들어 온 것은 1945년 이후로 일본 외무성이 있는 카스미가세키 근처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지난 7월18일 재건축하여 입주한 도쿄의 미나토(港)구 아자부(麻布)의 한국 대사관도 재일교포 서갑호씨가 기증한 토지에 건축한 것이다.



베이징의 후통(胡同)과 양사성(梁思成)교수



도쿄에서 일본어 공부와 함께 도쿄학을 배웠다면 베이징에서는 혼자 시내 탐방으로 베이징학에 입문하였다. 교외로 나가면 역사의 흔적이 많지만 당시 도로 사정이 안 좋고 외교관이 교외로 다니는 것은 중국 외교부의 허가사항이라 쉽지 않았다.



베이징에는 서울의 북촌 같은 전통주택 사합원(四合院)이 깔려 있고 그 사이로 인력거가 겨우 다니는 골목길이 있다. 이러한 골목길을 후통이라고 하는 데 원(元)나라 시대 우물(후통)을 중심으로 하는 동네를 의미했다고 한다. 14세기 전반 영락제가 원의 대도(大都)를 기초로 베이징을 발전시켜 원의 후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후통 안의 사합원에는 과거 귀족이나 벼슬아치들이 많은 대가족과 하인을 두었기에 방이 많고 정원이 컸다. 그러나 신 중국 이후 일반 서민들이 공동으로 사는 다세대 집단거주지가 되었다. 사합원 안의 화장실이 제한적이었으므로 후통 안에는 공동 화장실을 따로 두었다. 여름에는 후통 입구에 들어서면 묘한 냄새가 진동한다. 더구나 수 세대가 사는 사합원이 좁아 더위를 피해 후통을 거실처럼 쓰고 있어 옷차림도 자유롭다. 그래서 후통 체험은 겨울이 좋았다. 베이징의 모든 게 꽁꽁 어는 겨울은 냄새마저 꽁꽁 얼었다.



신 중국 성립 후 통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도시 발전을 위하여 부득이 주요 문은 남기고 성곽을 모두 헐어 도로를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학자들의 반대가 심했다. 특히 청말 양계초(梁啓超)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유학한 세계적인 건축학자로 청화대의 양사성교수의 반대가 심했다. 그는 세계 문화유산인 베이징 성은 그대로 두고 베이징의 동쪽 지금 왕징(望京)과 순이(順義)근처에 신도시를 건설하자는 안을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신 중국에는 그러한 자금이 없었다.



지금의 지하철 순환선과 제2환로가 성곽을 헐어 나온 돌을 기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인도가 1911년 수도를 옮기면서 올드(구) 델리를 두고 뉴(신) 델리를 건설한 반면에 중국은 올드 베이징에 뉴 베이징을 만들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두 도시의 이야기(베이징과 도쿄)



세계 GDP 2위 3위를 점하는 경제 컨트롤 타워가 있는 베이징과 도쿄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 당초 중심도시가 아니고 변방의 군사도시가 수도가 된 경우이다. 수도로 정한 실력자는 문인이라기보다 무인(武人)이었다. 베이징의 경우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아들 중 가장 용맹한 넷째 아들 주체(朱? 후에 영락제)였고 도쿄의 경우 일개 어촌에 불과한 에도를 군의 최고 사령관격인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건설한 군사(幕府)도시이다.



도쿄 역시 일본의 문화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도시로 에조(蝦夷)라는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한 변방 개리슨 타운에서 시작하였다. 베이징 경우에도 이 지역에 수도를 정한 몽골족(원)이 명 태조 주원장에 의해 북쪽의 고원으로 쫓겨났지만 권토중래의 재침을 막기 위한 명의 가장 강력한 군대가 주둔한 군사도시였다.



둘째는 항상 라이벌 도시가 준비되어 언제라도 수도의 기능을 빼앗길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베이징은 난징이 수도가 될 때는 베이핑이라는 이름을 써야 했다. 난징에 의해 수차 도전을 받아 왔지만 마지막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의 신 중국 건설에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근거지인 난징을 버리고 베이징을 수도로 다시 정했다. 도쿄도 오사카라는 대도시가 항상 라이벌 도시로 준비 되어 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서(西)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도쿄는 문화가 없는 사무라이(武人)도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에도 정부는 망했지만 일왕 명치가 천도하여 수도가 된 이래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열도의 중심지인 나고야 인근에 신수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금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세 번째는 양국의 수도가 전통적 정치 문화 중심지에서 지우 쳐 있어 수도 기능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중요한 영토를 지켜내는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경우 도쿄에 수도를 정함으로서 도호쿠(東北)지방과 혹가이도(北海道)를 안을 수 있었고 베이징의 경우 산해관(山海關) 넘어 둥베이(東北)지방(구 만주 지역)을 관리하는 데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가 되었다. 만일 일본의 경우 수도가 오사카였다든지 중국의 경우 난징이 수도였다면 각 각 일본과 중국의 영토를 고루 관리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