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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흔들리는 자신, 만연하는 불신

중앙일보 2013.08.05 00:16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8월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광복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달이다. 68년 전의 그날, 1945년 8월 15일의 감격을 되새기기에는 너무도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날의 감격과 흥분은 80세를 넘어선 어른들이라야 생생히 기억하리라. 그러나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날로부터 지금껏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공동운명을 개척하는 이 작업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그러기에 광복절을 맞는 우리들에게 큰 감격이 없다 해도 나라의 미래에 대한 자성의 시간은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한반도라는 땅과 동북아라는 주소, 한민족이란 국민,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민족의 역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와 민족공동체가 어떤 형태와 방향으로 어떤 절차에 따라 나아갈 것인지를 가름하는 나라 만들기는 시대와 세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에겐 피해갈 수 없는 선택의 과정이다.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 광복의 감격보다 불만과 불안이 쌓여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나라가 처한 선택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북관계 및 국내외 사정의 심각성에 못지않게 이에 현명하게 대처할 우리 공동체의 자세 자체가 불안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믿음[信]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 스스로의 위치, 성취, 능력에 대한 믿음, 즉 자신(自信)이 흔들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어떤 시련이나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국민의 자신감이 점차 처져가는 느낌이다. 둘째로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국민들 사이의 신뢰가 무너져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不信)의 병폐가 만연되는 것이다. 이해와 화합보다는 증오의 대상과 집단이 늘어가는 위험한 사회적 병리현상이 퍼져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이러한 믿음의 위기를 진정시킬 범국민적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우리가 당면한 국내외의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 즉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심각하다고 볼 수는 없다. 전 세계가 민주정치의 혼란과 시장경제의 파탄이란 이중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는 비교적 잘 버텨나가고 있지 않은가. 민주정치의 선진국을 자처하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정치적 혼선과 비능률이 일상사가 되었는가 하면 ‘아랍의 봄’으로 상징되었던 민주화의 물결은 도처에서 파탄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25년 우여곡절 속에서도 여섯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선출했으며 여야 간 정권교체를 무리 없이 거듭해온 한국 민주정치의 안정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선진국 자본시장에서 발화된 지난 5년의 세계적 금융대란과 불황 속에서도 두 번이나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상향 조정된 것은 국민과 기업의 저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얽매여 나라의 기본과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여유를 잃어가고 있다. 생각보다는 흥분, 믿음보다는 의심이 앞서는 생활이 습관화된 듯하다. 불신(不信)이란 악성질환에게 자신(自信)이 설 자리를 내주고 공동체는 허덕이고 있다. 분열을 봉합하기보다는 확대재생산하는 분열의 전도사들에게 너무나 큰 공론(公論)의 공간을 점령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자신과 우리 국민, 즉 이웃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나라의 갈 길을 바로잡기 위하여 종교계·학계·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범국민적 공론의 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래 우리 문화의 전통은 동포들이 상부상조하며 함께 잘 살아가는 소박한 규범을 토대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한 공감대의 뿌리가 깊지 않았다면, 그리고 서로를 믿으며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수많은 위기와 험난한 고비를 넘어 오늘에 이르렀겠는가. 지금도 국민들은 공공이익을 위한 공정하고 확실한 절차만 보장된다면 개인의 이익에만 매달리지는 않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어떻게 하면 공익을 앞세우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폭넓은 공론이 필요한 것이다.

 이 나라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라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지분(持分)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지, 힘들더라도 자신 있게 시대적 공론을 시작할 때다. 국민참여를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정치제도 개혁, 경제 운용, 소득 및 복지 분배를 어떻게 국민의 지분과 연계시키느냐는 경제민주화의 실천전략에 대한 공론이 국민적 관심의 중심을 차지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되찾고 불신을 자제하는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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