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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온전한 주인이 된다는 건 …

중앙선데이 2013.07.19 23:32 332호 28면 지면보기
노예는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해야 한다. 부정하지 못한다면, 부정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감정을 소중히 지키려는 순간, 노예가 아니라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게 될 테니.

강신주의 감정 수업 <40> 비루함

벙어리지만 힘이 장사였던 농노 게라심이 같은 처지의 타티야나에게 연심을 품었을 때 여지주가 서둘러 타티야나를 다른 농노에게 시집 보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으로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게라심은 슬픔과 당혹감에 젖어들었지만, 금방 체념하고 만다. 그러나 아무리 순박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부정당한 느낌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상심해 있을 때 게라심은 강가 진흙 펄에 빠져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구하게 된다. 그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그는 불쌍한 강아지를 데려와 기르게 된다. 타티야나를 상실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그는 강아지에게 ‘무무’라는 이름을 붙이며 온갖 애정을 쏟는다. 아마 인간이 아닌 동물을 사랑한다면, 여지주도 뭐라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판단도 한몫했을 것이다.

투르게네프(Ivan S. Turgenev·1818~1883)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관료 생활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아버지와 아들』 『첫사랑』 등 휴머니즘과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소설을 썼다. 특히 존 골즈워디가 19세기 세계 문학 중 가장 감동적인 소설이라 극찬했던 ‘무무’는 황제 알렉산드로 2세가 농노제 폐지를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지주는 예외를 두지 않았다. 어쨌든 농노는 감정의 주인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게라심이 방심한 것이다.

여지주는 무무를 죽이려고 한다. 그것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지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침내 게라심은 스스로 무무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자신을 그렇게도 따르던 무무를 위한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니까 말이다.

1854년 출간된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무무(Mumu)’에서 가장 서글픈 장면이 이렇게 펼쳐지는 것이다. 무무가 좋아했던 음식, 그러니까 고기가 가득 담긴 양배추국에 마른 빵을 부스러뜨려 넣은 음식을 먹이는 게라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게라심은 무무에게 마지막 만찬을 근사하게 차려주며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만찬이 끝난 뒤 그는 무무를 배에 태우고 강 중심부로 노 저어 간다.

그는 억센 두 손을 무무의 등에 포갠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마침내 게라심은 몸을 쭉 펴고는 어떤 병적인 분노의 표정으로 자기가 가져온 벽돌을 노끈으로 서둘러 묶고, 올가미를 만들어서 무무의 목에 걸고 무무를 물 위로 들어올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무무를 바라보았다. …무무는 무서워하지 않고 신뢰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작은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게라심은 얼굴을 돌리고 나서 실눈을 뜨고는 두 손을 폈다… 게라심은 물에 떨어지면서 무무가 낸 날카로운 비명 소리도, ‘철썩’ 하고 튀어 오른 둔탁한 물소리도, 다른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에게는 가장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지나간 것이다. 마치 가장 고요한 어떤 밤이 우리에게는 전혀 고요하지 않을 수 있듯이.

표면적으로 게라심은 여지주의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무무를 강물 속에 던지는 순간, 게라심은 농노로서의 비루함도 함께 버리게 된다. 철저하게 여지주의 말에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여지주의 손에서 무무를 빼앗아 자신의 손으로 무무의 생명을 앗으려는 결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침내 게라심은 자신을 지배하던 소심함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스피노자의 『에티카』중)

‘슬픔’은 어떤 타자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이런 슬픔이 반복될 때, 게라심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나 소심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게라심은 스스로 자신이 사랑하는 무무의 목숨을 거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라는 말이다. 그의 행위는 제한적이나마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던 능동적인 결단이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개일지라도 무무에 대한 애정이 그를 조금씩 주인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기적 아닐까?

그렇다. 타티야나든 아니면 무무이든 간에 사랑하는 대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게라심은 계속 여주인이 가장 신뢰하는 농노로서의 삶을 영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빼앗기면서, 게라심은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무무를 죽인 뒤, 게라심이 도망을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다. 비루함에 빠져 있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결단인 셈이다.

투르게네프는 도망에 성공한 게라심이 “이후로는 절대로 여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심지어 여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자기 집에서 한 마리의 개도 기르지 않았다”고 묘사하면서 소설을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의 트라우마로 독해하지는 말자. 게라심은 결심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의 삶에 완전한 주인이 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아니 이렇게 해석해야만 한다. 슬픈 무무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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