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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전 각서, 소송 때 효력인정 드물다

중앙일보 2013.07.16 00:55 종합 2면 지면보기
명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A씨(41·여)는 2002년 인터넷 만남사이트에서 상가임대업을 하던 B씨(48)를 알게 됐다. 잦은 전화통화를 하던 두 사람은 2004년 초 실제로 만났고 연인이 됐다. 성관계 또한 지속적으로 가졌다. 하지만 A씨가 임신하고 나서 결혼을 요구하자 B씨는 낙태를 요구했다. 결국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이후 두 차례 임신을 더 했으나 B씨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소송 안 건다" 작성하더라도 당시 예상 못한 상황 생기면 이혼소송 증거 채택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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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네 번째 임신을 알리면서 A씨가 낙태하지 않겠다고 강력히 얘기하자 B씨는 결혼을 약속하며 동거를 제안했다. 하지만 동거 후 B씨는 다시 ‘이번만 아이를 지우고 결혼해서 낳자’며 A씨를 회유했다. 이에 실망한 A씨는 B씨로부터 총 7200만원을 받은 뒤 각서를 써주고 낙태를 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A씨가 입은 상해에 대해 B씨가 5000만원을 지급하되 돈을 더 요구하지 않고 앞으로 연락도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A씨는 위자료를 달라며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B씨는 “관계 청산을 전제로 돈을 지급했고 A씨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고 한 만큼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A씨는 각서가 효력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 김상준)는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B씨는 A씨에게 1억39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각서 기재내용과 달리 각서 작성 이후에도 두 사람이 상당 기간 동거했으며 ▶각서에 기재된 돈의 액수와 실제 지급된 돈의 액수가 다른 점 등을 종합할 때 해당 각서의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사이가 악화된 부부가 이혼 소송 과정에서 기존에 작성했던 각서를 증거로 제출하는 일이 잦다. 하지만 각서가 실제 소송에서 효력을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다. 법무법인 세종의 최명호 변호사는 “각서 작성 당시 예상 못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아 실제 인정되는 사례는 적다”고 설명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부장 김귀옥)는 지난 5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운 C씨(40)가 이혼 소송 과정에서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 각서가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C씨는 2011년 남편과 아이들이 미국 여행 중일 때 다른 남자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남편이 통화내용을 우연히 알게 됐다. 이후 내연남이 남편에게 5000만원을 빌려주는 대가로 ‘ 민·형사상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작성했다. 재판부는 남편이 C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소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합의는 당시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며 “남편이 미국 여행 이전에 행해졌던 불륜 사실에 대해서는 몰랐던 만큼 손해배상 청구권리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드물긴 하지만 법원이 효력을 인정하기도 한다. D씨(22)는 남편과 내연녀에게 불륜사실을 인정하는 자술서를 제출받는 조건으로 ‘부정으로 인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작성해줬다. 대구가정법원은 D씨가 남편과 내연녀를 상대로 4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제기한 이혼 및 손해배상소송에서 “각서 작성 후 두 사람의 부정한 행위가 없었다”며 “각서에 따라 제소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이뤄진 만큼 소를 각하한다”고 판결했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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