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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소기업지원법 시행 두 달 딜레마

중앙일보 2013.07.16 00:37 경제 1면 지면보기


근로자 교육훈련 컨설팅업체인 K사의 전모(57) 대표는 최근 들어 ‘회사를 쪼갤까’ 하고 고민 중이다. 정부 입찰에 참여할 수 없어서다. 이 회사의 연 매출은 60억원 정도다. 이 가운데 정부입찰로 벌어들이는 게 약 20%다. 전 대표는 “교육훈련 프로그램이나 컨설팅 관련 정부 입찰은 대개 4000만~5000만원, 많아야 8000만원 정도”라며 “올해부터는 이런 입찰에 우리 같은 중(中)기업은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소기업만 1억 미만 정부사업
중기업 "회사 쪼개야 하나" 공공기관 "일감 줄 곳 없다"



실제로 그는 올해 5월 말 정부 산하 기관의 교육컨설팅 용역에 입찰서류를 냈다가 퇴짜를 맞았다. 전씨는 “해당 기관에서 ‘법이 바뀌어서 10인 이상 기업은 응찰자격이 없다’고 반려하더라”며 “50명 일하는 우리 회사가 그런 차별을 받을 만큼 큰 기업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50명 회사가 큰 기업이라니 …”



 K사의 입찰 기회가 박탈된 건 올해 5월 16일 개정 공포된 ‘중소기업 제품 구매 촉진 및 판로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때문이다. 시행령 제2조 2항은 ‘공공기관장은 1억원 미만의 물품이나 용역을 조달할 경우 소기업 또는 소상공인끼리 제한경쟁입찰로 계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여기서 말하는 소기업은 상시근로자 10인 미만 업체(중소기업 기본법의 대통령령)다.



정부에서 시행령을 바꾼 이유는 소기업과 소상공인을 키우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벤처 창업붐을 일으키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생각지 못한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



벤처 육성 안 되고 뜻밖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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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구로구의 I 소프트웨어업체는 최근 두 차례나 정부 입찰에서 쓴맛을 봤다. 1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이 업체의 전문분야는 리더십·직무분석·임금조정과 같은 인력개발 프로그램 구축이다. 하지만 지난달 말 남부발전의 e-HRD(사이버 인력개발 시스템) 구축사업과 한국전력의 역량모델링구축사업에 응찰하지 못했다. 이들 사업의 입찰 가격은 각각 5800만원과 7700만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춰가기 시작한 중기업들은 회사분할을 고민한다. 정부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9명짜리 기업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사 분할이 녹록하지만은 않다. 고용 문제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I소프트웨어 방모(42) 상무는 “회사를 쪼개면 당장 입찰에 참여할 자격은 생기겠지만 우수 인재 확보가 어려워질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유능한 인재를 채용하기 힘든 판에 회사를 여러 개의 작은 회사로 쪼개면 신규인력 채용은 고사하고 고용불안이나 불만을 느낀 유능한 기존 인력마저 빠져나가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전 대표는 “중소기업은 열심히 일해서 기업 규모를 키워야 경쟁력이 생기고, 일자리도 창출된다. 그게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일 텐데, 정부 정책은 자꾸 반칙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소기업 능력 부족” 사업 거의 유찰



 입찰공고를 내는 공공기관도 고민하긴 마찬가지다. 실제로 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1억원 미만 입찰사업은 대부분 유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독서 통신 우편 원격교육 시스템 사업(3200만원)’은 5월과 6월 두 차례 유찰됐다. 소기업 한 곳이 응찰했지만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어 사업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지난달 입찰공고를 냈던 한전의 역량모델구축사업과 남부발전의 e-HRD 구축사업도 유찰됐다.



이들 공공기관은 결국 중기업도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 재입찰공고를 최근 냈다. 산업인력공단 관계자는 “공공기관의 각종 사업은 감사를 받는다”며 “사업 결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기술교육대 유길상 교수는 “벤처를 키우려는 정부의 의도는 십분 이해한다”며 “하지만 작을수록 퍼주기식 혜택을 주는 것은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오히려 M&A를 활성화해 기업 규모를 키우도록 독려함으로써 청년이 매력을 느끼도록 해야 고용이 창출된다. 소기업은 중소기업협동조합과 공동사업을 벌이는 등의 방식으로 실력을 키우도록 한 뒤 경쟁시켜야 제대로 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기찬 선임기자



중·소기업 구분  중소기업기본법에 업종별, 종사자 수, 자본금 규모 등에 따라 구분해 놓았다. 제조업·광업·건설업·운송업은 50인 미만이면 소기업으로 보고, 50인 이상 300인 미만이면 중기업으로 본다. 소상공인은 10인 미만이다. 나머지 업종은 소기업 10인 미만, 소상공인 5인 미만이다. 중기업의 하한선은 10인 이상이지만 상한선은 업종별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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