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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전위' 김구림 … 예술은 늙지 않는다

중앙일보 2013.07.16 00:18 종합 21면 지면보기
백발을 하나로 묶어 꽁지머리를 한 김구림은 생애 첫 미술관 개인전에 "감개무량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1. 1970년 4월 경복궁 내 국립현대미술관서 열린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초대작가 중 하나였던 김구림은 미술관에 5m 높이의 얼음덩어리를 설치해 녹아 없어지는 과정을 전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제목은 ‘현상에서 흔적으로’, 미술로 시간을 보여주리라는 생각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서 개인전

주최 측은 전시장에 물이 차 다른 작품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설치를 불허했다. 당시 34세였던 작가는 “초청해 놓고 출품을 불허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맞섰지만 ‘예술가의 한가한 넋두리’로 그쳤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던 해였다.



실험영화·퍼포먼스 … 파격 시도



 #2. 15일 서울 서소문로 서울시립미술관 1층 전시실, 붉은 방수포에 쌓인 3m 높이 얼음이 입구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축소 복원된 ‘현상에서 흔적으로’다. 녹은 물을 그대로 바닥에 흘리는 게 작가의 의도였지만, ‘침수’를 우려해 일부는 펌프로 빼내기로 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미술관으로서는 난감한 작품인 셈이다.



 그는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미술계의 돈키호테다. ‘영원한 아방가르드’ 김구림(77)의 첫 미술관 개인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16일 개막한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뿌리를 보여주는 그의 60~70년대 작품으로 이뤄진 회고전이다. ‘행위예술’의 속성 등으로 인해 유실된 작품은 새로 복원했다. 77세 노장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40여 년 전 상상력을 펼친다.



시대가 변했으니 작품도 변해야



최초의 실험영화로 기록된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1969). 차에서 본 고가도로 난간, 샤워 장면, 하품하는 남자 등 일상의 소소한 장면이 소리도 없이 10분간 흘러간다. 1초에 24컷이 돌아야 현실의 시간이 되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김구림은 전후의 가난 속 파편화되고 나른한 일상을 보여줬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최초의 실험영화 ‘24분의 1초의 의미’(1969)도 볼 수 있다. 16㎜ 필름으로 복원된 이 영화는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소장키로 했다. 이 미술관은 올 초 ‘풍덩(A Bigger Splash): 퍼포먼스 이후의 회화’전을 기획하면서 잭슨 폴록·데이비드 호크니·구사마 야요이의 작품과 함께 김구림의 1969년 바디 페인팅을 전시했다.



 193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경북의 한 대학을 다니다가 “내 질문에 시원하게 답해주는 교수가 없다. 저 학비로 하고 싶은 작업이나 실컷 하겠다”며 자퇴했다. 헌책방서 외국잡지를 보며 전위예술의 흐름을 익혔다. “미쳤다” “공산주의자다”라는 비난도 받았다.



 일본·미국으로 건너가 문화센터 강사 등을 하며 전업예술가로 생계를 꾸렸다. “가장 아쉬운 것은 돈 없어 구상 단계에서 사장돼 버리는 기획들이었다. 또한 나도 인간인지라,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도리는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나도 작품을 팔고 싶었다”고 돌아봤다.



 -스스로 만든 형식마저 파괴해 나간 예술가다. 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



 “내겐 형식이란 게 없다. 내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였다. 흑백 TV는커녕 제니스 라디오 하나가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매개체였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몇 초 안에 영국·미국과 교신하는 세상이다. 인간은 시대가 변하면 그에 맞게 삶의 방식도 바꿔왔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갈 건가, 시대가 변하면 내 작품도 변할 거다.”



 -여든을 바라본다. 앞으로 계획은.



 “계획이라기보다 원하는 게 하나 있다. 내 작업을 후배들에게 한 번 좍 펼쳐 보여주고 싶다. 그간 한 번도 제대로 보여진 적이 없으니까. 안 되는 여건에서도 계속해온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



40여 년 흘러 역사적 가치 재평가



 영국 테이트 미술관 이숙경 큐레이터는 “예술 장르의 통섭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 지금, 김구림의 작품은 시대를 앞선 급진적 실험의 선두로서 그 역사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고 했다. 10월 13일까지. 02-2124-8800.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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