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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후견인, 치매노인·장애아 80만 명의 집사 될까

중앙일보 2013.07.15 00:54 종합 3면 지면보기
지적장애 3급을 앓는 홍모(23·여)씨는 부모 없이 먼 친척 할아버지(85)와 함께 산다. 지하철을 타거나 집 앞 가게에서 먹거리를 사는 등 간단한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1년 넘게 먹는 약이 무엇인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내가 죽고 나면 오갈 데 없는 손녀는 어떡하지…”라는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년후견제 7월 시행 … 32건 접수
가족 외에 변호사·복지사도 가능
도덕적 해이 막으려 감독인 선발
후견인 급여 등 부담 줄이기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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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2년 전 일이 터졌다. 이웃집에 살던 50대 아저씨가 홍씨에게 다가가 “휴대전화 명의를 빌려주면 요금은 아저씨가 알아서 내주겠다”고 꼬드겼다. 홍씨 명의의 휴대전화로 몇 달 만에 연체요금만 180만원이 나왔다. 통신사에 문의해도 “성인이 본인 명의로 계약했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고만 했다. 결국 홍씨는 지난 1일 복지관의 도움을 받아 서울가정법원에 특정 후견인 심판 청구를 했다. 후견인이 통장 개설·관리 등 복잡한 금융업무를 대리해 주고, 병원 진료를 받거나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할 때 도움을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치매 등 질병이나 정신 장애, 노령 등을 이유로 사회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성년후견제도가 지난 1일 시행된 후 청구가 잇따르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1~7일 일주일 동안 전국 법원에서 32건의 후견인 심판 청구를 접수했다고 14일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연말까지 약 850건이 접수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신속하게 적합한 후견인을 선임해 법적인 ‘집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성년후견제는 법원이 적극 관여해 피후견인을 돕자는 취지에서 도입했다. 기존 금치산·한정치산제는 피후견인 본인의 의사·능력과 관계없이 당사자로부터 각종 행위 능력을 빼앗는 데 초점을 뒀다. 후견인도 배우자, 직계혈족, 방계혈족 순으로 고정돼 있어 변호사·법무사 등 전문 후견인을 둘 수 없었다. 후견 범위가 주로 재산 관리에 한정되고, 가족관계등록부에 기록이 남는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성년후견제는 피후견자의 능력을 살리는 데 초점을 뒀다. 피후견인은 장애 등급에 따라 성년·한정·특정 후견으로 세분화해 후견인을 청구할 수 있다. 법원은 후견인을 선임하고 재산 관리, 의료행위부터 결혼·입양 등 신분상 변동까지 구체적인 후견 범위를 지정한다. 별도 등기 제도를 마련해 개인정보도 보호했다.



 이 같은 장점 때문에 장애인 단체 등에선 지속적으로 성년후견제 도입을 주장해 왔다. 프랑스(2007년 도입), 스위스(2008년) 등 유럽 국가도 속속 도입하는 추세다. 이상희 보건복지부 장애인서비스과장은 “선진국에선 인구의 1~3%가 후견인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추산한다”며 “국내에서도 치매노인 57만6000명, 발달장애인 13만8000명, 정신장애인 9만4000명 등 80만8000여 명이 후견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년후견제에서 주목할 것은 후견인이다. 배우자나 친척뿐 아니라 변호사·법무사·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도 후견인으로 둘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서울가정법원도 12일 변호사 42명, 법무사 27명, 세무사 20명, 사회복지사 12명 등 101명을 후견인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만큼’ 관리에 구멍이 생길 여지도 커졌다. 법원 관계자는 “후견인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중요한 후견 업무에 대해선 법원으로부터 사전 허가를 받도록 했다”며 “필요 시 후견 감독인도 선임토록 했다”고 말했다.



 법원은 후견인 중에서 후견 감독인도 선발할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후견 감독인에겐 고도의 윤리성이 요구되는 데도 불구하고 별도 교육도 없이 임시방편으로 추진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나온다. 제철웅(한국성년후견학회 회장)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재산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피후견인 재산을 은행에 신탁하도록 해야 한다”며 “영국·캐나다·호주·싱가포르처럼 체계적으로 성년후견인 선발·교육·관리감독을 전담하는 부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후견인 급여 등 비용 부담도 과제다. ‘한정후견’을 신청할 경우 정신감정 절차에만 최소 300만원 이상을 자비로 부담해야 한다. 이상희 과장은 “후견심판 청구비(50만원), 공공후견인 활동비(매달 10만원)를 지원하고 자원봉사자 성격의 ‘시민 후견인’도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에서 ‘성년후견제’로 검색하면 대법원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law_zzang/150170096849)로 연결되고 여기서 제도 이용이 가능하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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