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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백석 … 한국 현대시의 기틀 닦은 두 천재

중앙일보 2013.07.15 00:23 종합 23면 지면보기
청록파 시인에 큰 영향을 미친 정지용은 김영랑·박용철 시인 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주도한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9년 ‘시문학’ 창간호에 실린 창립동인 기념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하윤·박용철·정지용·변영로·정인보·김영랑. [중앙포토]


정지용과 백석은 분단시대의 희생자지만 분단의 벽을 뛰어넘어 한국현대시의 흐름을 바꾼 대표적인 시인이다. 둘 다 서구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이를 한국적 전통으로 승화시켜 후대의 전범이 됐다.

정전 60년 1953~2013 - 월북·납북 문인이 남긴 유산 ② 현대시, 새롭게 태어난 전통성
정지용 - 독창적이고 세련된 언어 감각
백석 - 모더니즘과 향토색 탁월한 조화



 정지용의 시는 우선 청록파에 의해 계승된다. 박목월은 향토적 서정을, 조지훈은 고전적 혁신을, 박두진은 종교적 깊이를 개척했으며 청록파의 시는 더 넓게 확장돼 박목월의 제자인 오세영·이건청·조정권이나 조지훈의 제자인 정진규·오탁번·김명인 등으로 그리고 박두진의 제자인 정현종·강은교·천양희 등 여러 갈래의 서정시로 퍼져나갔다.



 백석의 시는 중학교 시절 처음 백석의 시를 읽고 감동과 충격을 느꼈으며 시집 『사슴』을 ‘시를 공부하는 교과서’로 삼았다는 신경림을 선두로 ‘모닥불’을 전범으로 삼은 최두석은 물론 백석의 시 구절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시집의 제목으로 한 안도현, 민중의 보편적 감정을 노래한 정일근·문태준 등의 리얼리즘적 서정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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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시의 혁신과 파괴=1902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은 일본 교토 유학시절 ‘조선지광’과 일본의 문예지 ‘근대풍경’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문명을 날렸으며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하며 국내문단의 선두주자로 부각됐다. 첫 시집 『정지용시집』(1935) 간행을 계기로 지용은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지칭됐다. 초기의 ‘향수’ ‘유리창’ 등 지용의 명성을 드높인 시편들과 더불어 ‘바다 2’와 같이 발랄한 기지를 엿보게 하는 시편도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지용은 잠시 가톨릭 신앙시를 쓰기도 했지만 두 번째 시집 『백록담』(1941)에서 보여준 고전적 세계의 탐구는 한층 심화한 시적 도약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비’ ‘구성동’ ‘백록담’ 등에서 보여주는 산수시의 탐구와 산문적 형태로 그는 최초의 모더니스트라는 종전의 평가에서 한걸음 나아가 전통을 혁신시킨 현대시의 아버지로 격상됐다.



 지용의 산수시는 자연에 대한 탐구이며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다. 억압의 식민지시대 지용이 택한 시의 길이 거기에 있었으며 그가 시도한 산문시는 종전 자유시 형태의 파괴와 혁신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도전적인 것이었다.



 지용 이전에 지용 같은 시인은 없었다. 같은 해 출생한 김소월의 노래하는 슬픔의 시와 아주 다르다는 점에서 지용은 독창적이었다. 지용의 시는 정서를 물질적 이미지로 변용시켜 조형적 견고성을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근대시는 현대시로 탈바꿈했다.



 48년 남북분단은 지용에게 큰 생의 시련을 안겨 줬다. 그는 좌우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을 떠나 녹번동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홀연 납북됐다. 여름 홑저고리 차림으로 제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집을 나섰다고 전해진 뒤 실종됐으며 북한 당국의 공식 자료에는 의정부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북에 있던 아들 삼남 구인씨가 남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2001년 제 3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 왔으나 큰형 구관씨만을 만나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보도됐다.



 ◆모더니티를 품은 향토주의=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백석은 시집 『사슴』(1936)으로 강요당한 근대의 질주를 역행하는 듯한 폭탄을 세상에 던지며 혜성과 같이 시인으로 등장했다. 김기림은 이 시집에 대해 “주책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했다.



 시집 『사슴』에서 백석은 기층 민중의 삶 속에서 원초적 생의 감정을 발견하고 이를 민중 자신의 토속적 언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평북 정주지방의 낯선 방언의 돌출과 산문적 형식의 서술적 시행은 동화와 전설의 세계에 새로운 모더니티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첫 사랑의 실패가 한 요인이 됐을 것이라 알려졌지만 백석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국내 최초로 번역한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를 출간하기 위해 1940년 서울을 일시 방문했지만 이후 만주 지역에서 측량 서기 보조나 소작일 등을 했다. 명작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쓰던 때 그의 자의식을 지배한 것은 운명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운명에 희생당한 인간의 모습은 테스와 백석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부분이다.



 백석의 불행은 분단으로 더욱 극명하게 전개됐다. 분단 이후 고향에 체류하다가 북에서 활동하게 된 자유주의자 백석은 당의 혁명문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러시아문학 번역에 전념하는데, 이 시기 그는 러시아 혁명기 문학을 대표하는 숄로호프의 대하 장편 『고요한 돈』(1949)을 비롯해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슈킨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백석의 번역은 최유찬이나 방민호가 논증한 것처럼 백석 특유의 언어감각이 그대로 살아 있어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서 평가된다.



 러시아 휴머니즘 문학에 공명한 백석이 아동문학에 힘을 기울여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1957)을 간행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이다.



백석에게 비운의 순간은 불의에 닥쳐왔다. 58년 10월 부르주아 잔재청산을 요구한 당의 ‘붉은 편지’ 사건으로 백석은 평양문단에서 산골 오지인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의 현지지도원으로 파견된다. 인생의 전반부는 조선의 천재 시인으로, 인생의 후반부는 추방된 양치기로 30년 넘게 살아야 했던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백석의 문학은 ‘한국적 페시미즘의 절창’이라고 본 유종호를 필두로 김현·고형진·이숭원 등에 의해 연구됐고 이동순·송준·김재용·김문주 등에 의해 자료발굴이 계속됐지만 최근 공개된 자료들에 대한 적극적 연구가 과제로 남아 있다. 백석을 재평가하는 것은 식민지시대 말 한국문학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는 일이며 분단시대 한국문학의 전체성도 다시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종전 60주년을 돌아보는 오늘의 시점에서 일반 독자는 지용보다 백석을 선호하는 듯하다. 지용의 조탁된 언어보다 백석의 토속어가, 지용의 지적 엘리트주의보다 백석의 민중적 서정성이 독자에게 호응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천재 시인은 한국 현대시사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지닐 것이다. 최동호(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필자 소개=1948년 수원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공놀이하는 달마』 『얼음 얼굴』 등. 시론집 『현대시의 정신사』 『정지용시와 비평의 고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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