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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사가 쓰는 性칼럼] 뇌 멍들게 하는 성폭력

중앙선데이 2013.07.14 00:18 331호 18면 지면보기
“쉬잇! 너만 참으면 된다. 일 키우지 말고 덮기로 하자.”

 30대 여성 K씨는 어린 시절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K씨의 모친은 오히려 ‘왜 뛰쳐나오지 못 했느냐’고 타박까지 했다. 피해자의 고통은 무시되고 죄인 취급까지 당한 K씨는 분노와 자책으로 세월을 보냈다. 성폭력의 상처를 이기고 잘 지내는 여성도 있지만, K씨처럼 결혼 후 성생활까지 어려운 경우도 있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는 성인이 되어도 불안·우울 등 정신과적 증상이나 성기능 장애 등의 후유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은 건 엄연한 사실이다. 피해 여성들은 전쟁이나 심각한 사고에서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준하는 고통을 당한다. 이는 뇌에도 영향을 줘서 감정과 관련된 해마 등에 이상소견이 보고돼 왔다.

 최근 성폭력이 피해자의 심신에 장기적으로 어떤 손상을 주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지난달 미국 정신과학회지(AJP)에 발표된 연구에서 과거 학대를 받은 성인 여성 51명의 뇌 MRI를 조사했는데, 학대의 종류에 따라 각각 관여된 뇌의 피질이 두께가 얇아져 있더라는 것이다.

 성적 학대를 당한 여성은 성기의 감각을 담당하는 뇌의 피질이, 정서적 학대를 받은 여성들은 자존감·감정 조절과 관련된 뇌 피질의 두께 감소가 관찰됐다. 이는 학대의 종류에 따른 차별적인 뇌 손상을 규명한 첫 번째 논문이다.

일러스트 강일구
 실제로 뇌는 고통스러운 경험에 신경 가소성(neural plasticity)을 보여서 해당 부위의 반응이 위축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문제와 관련된 부정적 뇌 반응을 억제함으로써 단기적으로는 그 고통에서 당사자를 회피시켜 보호 역할을 한다. 그런데 뇌 피질의 장기적 억제는 추후 해당 피질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할 때도 기능상의 위축을 유발할 수 있다.

 해당 연구는 성적·정서적 학대에 따른 뇌의 기능 억제를 방치하면 만성적인 뇌 손상과 기능 위축을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적절한 대처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성폭행 피해자의 감정적 분노·상처를 내버려두면 평생 당사자를 고통에 빠뜨리고 추후 건강하고 안정된 성생활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조기의 적극적인 치료가 대단히 중요하다.

 부부관계에서 비록 성폭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고통 받고 상처를 떠안는 배우자가 많다. 지나치게 일방적 요구, 무관심, 폭력성이나 변태적 강압, 상대의 외모나 성기능에 대한 무시, 상대 탓만 일삼는 태도가 반복되면 배우자의 감정은 멍들고 친밀관계는 깨진다. 성관계는 소중한 대상과의 감정 교류로 ‘배려’가 제1의 원칙이다. 내 짝이 성문제로 힘들고 상처 받는다면 억제보다 허심탄회한 소통 노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문화의 성적 억제도 큰 문제다. 많은 선진국에서는 적극적인 성교육과 성적인 의사소통을 중시한다. 그런데 한국엔 올바른 성 담론과 지식 기반의 성교육조차 성범죄를 일으키는 저급한 유해물처럼 치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성이라는 단어에 무조건 기겁하며 나쁜 것처럼 여기고 억제하면 소중한 대상과의 건강한 성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겉으론 도덕적인 척하면서 뒤로는 숨어서 이상한 성에 탐닉하는 이중성이 사실은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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