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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난 한국 축구를 힐링하라

중앙선데이 2013.07.14 00:26 331호 19면 지면보기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11일 오전 경기도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열린 2013 동아시안컵 참가 출전 선수 명단 발표식에서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뉴시스]
이제는 진부한 레토릭이 됐지만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흔히 ‘독이 든 성배’라고 부른다. 영광스럽지만 거센 비난을 받으며 낙마하기 쉬운 위험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그랬다.

동아시안컵 시험대 선 홍명보 감독

 국가대표 축구 감독은 월드컵에 맞춰 4년 주기로 교체되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다. 2000년 말 허정무가 해임된 후 거스 히딩크가 부임해 2002년 4강 신화를 일궜다. 움베르트 코엘류, 조 본프레레가 차례로 물러난 뒤 2006년 독일 월드컵은 딕 아드보카트가 지휘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6강 진출을 이끈 건 허정무 감독이지만 그 역시 핌 베어벡의 빈자리를 메우며 중간에 사령탑에 올랐다. 역사는 2014년 브라질 올림픽을 앞두고도 되풀이됐다. 조광래에 이어 최강희가 시한부 사령탑을 맡으며 아시아 예선을 힘겹게 통과했고 브라질 월드컵 본선을 지휘하는 사령탑에는 홍명보가 낙점됐다.

 홍 감독은 지난달 25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제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걸고, 경험했던 지식과 지혜로 몸과 마음을 대한민국 축구팀에 바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브라질 월드컵은 내년 6월 13일 개막한다. 이제 11개월 정도 남았다.

 오는 20일 개막하는 2013 EAFF 동아시안컵은 국가대표 사령탑 홍명보의 첫 번째 도전이다. 동아시아축구연맹(EAFF)이 주관하는 동아시안컵은 2003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5회째를 맞았다.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눠 20~28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잠실종합운동장, 경기도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다. 남자부에는 한국·일본·중국·호주가, 여자부에는 한국·북한·중국·일본이 출전해 풀리그로 챔피언을 가린다. JTBC는 전 경기를 독점 중계한다.

“1년 후 더 좋은 모습 보일 선수 뽑았다”
홍명보가 받은 성배 안에도 독이 들었다. 극심한 내부 갈등이라는 독이다.

 기성용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최강희 전 감독을 조롱하고 비하한 게 드러나 곤욕을 치르고 있다. 기성용은 지난달 SNS에 흥미로운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친구들과 알파벳 M과 B가 크게 새겨진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다. MB는 축구계에서 홍명보를 의미하는 이니셜이다. 네티즌들은 이를 두고 “최강희 후임 감독으로 홍명보 감독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했다”고 수군거렸다.

 동아시안컵에서 홍 감독의 첫 번째 과제는 대표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갈등을 치유하는 일이다. 홍 감독은 정치적인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다. 이번에도 재빠르고 적절하게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우선 기성용의 SNS 파문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던 날 최강희 감독과 만났다. ‘대표팀 내부에 최강희파와 홍명보파가 있다’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다. 홍 감독은 “최 감독을 만나 감사 인사를 했다. 선수들도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 것”이라고 했다. 최 감독파, 홍 감독파라는 말이 떠도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다.

 대표팀 명단을 발표한 11일에는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경고를 했다.

 기성용에 대해서는 “스승을 대하는 행동으로 적절치 못했다. 협회의 경고 조치와 대표팀 선발은 별개다. 취임 회견에서 말했듯 원 팀(One Team)에 입각해 판단할 것이다. 기성용은 협회의 경고조치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축구에서 옐로카드가 어떤 의미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앞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겠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시작도 하기 전에 여러 문제가 터져 피곤하지만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중요한 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보다 지금 털고 갈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아울러 대표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규칙도 정했다. 홍 감독은 “변화는 소집 훈련 첫날, 첫걸음부터 시작될 것”이라며 우선 파주 트레이닝센터에 입소할 때 정장에 넥타이·구두까지 갖춰 차려입으라고 주문했다. 또 입소 때는 파주 트레이닝센터 정문을 걸어서 통과하라고 지시했다. 그동안 대표 선수들은 모자, 티셔츠, 찢어진 청바지 등을 입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또 외제차를 타고 훈련장을 들락날락해 대표팀 관리에 어려움을 빚기도 했다.

 옷차림의 변화를 시작으로 대표팀에서 행동거지와 마음가짐까지 달라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전에 히딩크 감독도 부임 초 훈련·식사·이동 때 철저히 복장을 통일해 팀 분위기를 잡은 사례가 있다.

20~28일 일본·호주·중국과 격돌
이번 대회에 유럽에서 뛰는 선수는 출전하지 않는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한 A매치 데이가 아니기 때문에 소집할 수 없었다. 대신 한국·일본·중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로 라인업을 짰다. 홍 감독은 “눈앞에 보이는 동아시안컵보다 1년 후 브라질 월드컵 때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큰 선수를 뽑았다”고 했다.

 최강희 감독 시절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이동국(전북), 이근호(상주)는 제외됐다. 출전 선수 23명 명단을 보면 우선 박종우·이범영(이상 부산), 김창수(가시와), 황석호(히로시마 산프레체), 김영권(광저우 헝다) 등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선수를 대거 발탁한 게 눈에 띈다. 김진수(알비렉스 니가타)를 비롯해 김민우(사간 도스), 이용(울산), 고무열(포항), 윤일록(서울), 김동섭(성남) 등 6명은 대표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홍 감독은 “몇몇 선수에게 이번 대표팀 선발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투지를 자극하고 있다.

 홍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국형 축구’라는 용어를 쓰며 “한국형 전술을 만들어 한국형 플레이로 월드컵에 도전하겠다. 스페인 선수도 아니고 독일 선수도 아니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축구를 준비해 월드컵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체형과 기질, 특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축구를 하겠다는 것이다.

 여전히 팬들은 2002년 4강 신화를 이뤘던 히딩크 팀을 그리워한다. 홍 감독이 말하는 한국형 축구는 2002년의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홍 감독은 “기본적으로 콤팩트한 축구다. 선수들의 근면성·성실성·희생을 가지고도 전술을 만들 수 있다. 2002년에도 좋은 지도자 밑에서 좋은 전술로 축구를 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한국 선수는 공을 잘 빼앗고, 잘 빼앗긴다. 일단 공을 빼앗은 뒤 좋은 조직력으로 경기를 하면서 공을 지켜야 한다. 1년이면 강국과 맞붙어도 쉽게 뚫리지 않는 조직력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경기를 지배하는 축구를 강조하며 볼 점유율을 높이고,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90분 내내 상대를 압박하던 히딩크 축구와 겹치는 부분이 많은 전략이다. 홍 감독은 올해 초부터 5개월 동안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고 있는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FC 안지 마하치칼라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2002년을 그대로 모방하는 건 아니지만 강한 피지컬을 앞세우는 공격적인 축구를 펼칠 전망이다. 홍 감독이 동메달이라는 성과를 거뒀던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구사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대표팀은 20일 호주를 상대로 첫 경기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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